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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에세이

흔적

현정경 2021. 5. 2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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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살던 동네를 거닐었다. 중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집 근처의 슈퍼에서 빵빠레를 사먹었고, 큰길 건너편의 4층 빌딩 옥상에서 태권도 도장을 다녔다.

큰 길을 나와 밑으로 내려가면 오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은 무서운 형과 아저씨들이 있는 곳이기에 늦은 밤에는 갈 수 없었던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 주변을 자주 거닐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화장을 진하게 한 여성 무리들, 인상을 험악하게 짓고 다니는 남성 무리들, 가출한 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청소년들, 5시가 되면 퇴근하는 공장노동자 무리들, 더 내려가면 당시로서도 오래 전 일인지 파업의 상흔이 남은 폐기된 속옷공장.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와서 건너편의 달동네로 올라가면 당시에도 보기 힘들었던 판자집이 간간히 보였고 나는 그걸 국민학교 때나 보았기에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제였다.

슈퍼는 사라졌다. 조직폭력배도 사라졌다. 술집누나들은 보이지 않는다. 가출청소년 역시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화교들이 그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층민들이 모였던 그 동네에 이젠 새로운 하층민인 화교들이 그곳을 선택한 것일까? 도로는 매우 깔끔해졌고, 판자집이 있던 집에는 말끔한 빌라가 세워져있었다. 형이 데려온 강아지를 잃어버려 펑펑 울었던 그 골목길에는 에이스하이앤드 타워라는 건물이 들어서서 내가 기억하는 공간을 말끔히 없앤 뒤였다.

이제는 어디가 어디었는지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거기에서 나는 추억팔이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무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공간은 살아가는 인간의 기억과 흔적들을 담고 있다. 그것을 없었다는 듯이 새롭게 바꾸어버린다면 기억과 경험의 고리는 끊어진다. 과연 그런 불연속성이 자주 일어나는 공간에서 '공동체'는 가능한 얘기일까. 그래서일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상관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선택하게 된 이유.

[이관 글. 2018-04-22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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