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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론

혁명의 영점 서평

현정경 2021. 5. 30.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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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각주:1]을 읽었다. 이 글은 가사노동논쟁과 관련한 다른 연구들을 살펴보면서 이번 독서에 대한 나름의 정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노동력의 가치와 가사노동

가사노동은 노동력의 가치 개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도 하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재의 가치라고 정의한다.[각주:2] 하지만 이 재생산을 위한 (활동[각주:3]이 아닌) 노동(가사노동, 돌봄노동)은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 재생산노동을 수행하는 노동력이 상품이라면 이는 생산적 노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업주부, 일하는 여성의 이중노동으로 수행되는 재생산노동들은 임금을 받지 않는 부불노동이 대부분이므로 이런 노동들에 대해서는 생산적 노동으로 볼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지점에서 가사노동 논쟁의 초창기 논자들에게서 주요한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가사노동 논쟁과 페데리치

1970년대 초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가사노동 논쟁의 출발점은 정성진(2013)에 따르면 벤스턴(1969)[각주:4]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한다. 이후 1972년부터 5년간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페데리치, 달라 코스타 등이 참여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각주:5]이 있었고 이 참여자들이 가사노동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Wages for Housework march, 1977. (Schlesinger Library, Radcliffe Institute / Bettye Lane) In 1975. 출처 : The Nation

정성진(2013 : 14-15)[각주:6]의 정리에 따르면 초창기 가사노동 논쟁의 논자들은 두 가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한다.

  1. 가사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다. 달라 코스타(1972)[각주:7], 세컴(1974)[각주:8]
  2.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잉여가치 생산에도 공헌한다. 벤스턴(1969)[각주:9] 힘멜바이트&모훈(1977)[각주:10] 몰리뉴(1979)[각주:11]

정성진(2013)[각주:12], 이채언(2009)[각주:13], 김원태(2013)[각주:14] 등의 연구들은 이들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개념(가사/돌봄노동의 부불노동 개념)을 주요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특히 페데리치의 책을 보면서 느꼈던 부분이기도 한데 바로 가사노동의 가치절하 문제 혹은 계급에서의 주변화를 더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미르 아민, 안드레 군더 프랑크, 프란츠 파농의 저작에 가장 잘 표현된 반식민주의운동을 통해 부불노동에 대한 맑스주의의 분석을 공장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확장하고, 이를 통해 가정과 가사노동을 공장제의 "타자"가 아니라 그 기초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해 남성산업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노예화되고 식민화되었으며 공산주의 전통의 역사 속에서 주변화된 무보수노동자들의 세계 속에서 계급투쟁의 주역들을 발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력 (재)생산의 주체로 재개념화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주부 역시 이 주변화된 무보수노동자에 포함될 수 있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24.

초기 가사노동에 대한 논자들은 이렇듯 이원론적 접근에 기초한다. 이는 결국 가사노동의 부불노동 혹은 외부경제 상태에서 초래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따라서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의 목적은 "외부경제의 내부화"로 요약될 수 있겠다. 즉 가사노동을 생산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한 여성운동을 실천하는 것이 목적이라 하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우리의 착취에 대한 소위 영웅주의에 대한 찬미를 중단하라고. 지금부터 우리는 노동의 매 순간 돈을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노동을 거부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모든 노동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여성적 가치가 이미 계산가능한 화폐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만큼 더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46.

즉 내부화를 요청하면서 미조직된 가사노동자를 조직하여 투쟁하여 여성에게 전담되는 가사노동이라는 구조로부터의 해방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 같다. 이는 달라 코스타의 문헌에서도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performing social labour in a socialised structure' is no more than a sham reform. Women have worked enough, and they must 'refuse the myth of liberation through work'

'사회화된 구조에서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한 가짜 개혁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들은 충분히 일했으며 '일을 통한 해방의 신화를 거부해야한다'.

Dalla Costa 1972, pp. 34, 47. Vogel. L. (2013 : 21)[각주:15]에서 재인용됨

여기서 사회적 노동의 수행이라 함은 경제활동을 이야기 하는 것 같고 여성들이 직업인이 됨으로서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 신화라는 이야기이다. 리즈 보겔(2013 : 21)은 이를 인용하기 전 코스타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Dalla Costa proposes two major strategic alternatives. First socialise the struggle – not the work – of the isolated domestic labourer by mobilising working-class house- wives around community issues, the wagelessness of housework, the denial of sexuality, the separation of family from outside world, and the like. ‘We must discover forms of struggle which immediately break the whole structure of domestic work, rejecting it absolutely, rejecting our role as housewives and the home as the ghetto of our existence, since the problem is not only to stop doing this work, but to smash the entire role of housewife’. Second, reject work altogether, especially in a capitalist economy which increasingly draws women into the wage-labour force. In opposition to the Left’s traditional view of this latter tendency as progressive, Dalla Costa maintains that the modern women’s movement constitutes a rejection of this alternative.

달라 코스타는 주요 전략에 대한 두 가지 대안을 제안한다. 먼저 지역 사회 문제를 중심으로 부불 가사 노동, 섹스 거부, 가족과 외부 세계의 분리 등을 중심으로 노동 계급인 주부들을 조직하여 고립된 가사 노동자의 투쟁을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사 노동의 전체 구조를 즉시 깨뜨리고,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주부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빈민으로서의 집을 거부하는 투쟁의 형태를 발견해야한다. 주부의 모든 역할을 깨부수자. ' 둘째, 특히 여성을 임금 노동력으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을 완전히 거부한다. 좌파의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달라 코스타는 현대 여성 운동이 이 대안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Vogel. L. 2013. pp.20-21.

코스타와 보겔의 말을 정리해보자면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의 이중노동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과 '가사노동과 직업활동 모두에 열심인 슈퍼 우먼'이라는 것 역시 신화적이라는 사실을 염두해보자. 그러면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가사노동자로서의 주체적인 조직화와 단체행동이라는 운동이 더 유용한 투쟁 전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노동가치론과 재생산노동의 관계

가사노동의 불합리함을 분석하는데 노동가치론은 사실 쓸모가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애초부터 초기 가사노동 논자들에 대해 '이원론적 접근'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압축적으로 묘사된다고 보여진다. 그러니까 초기 가사노동 이론들이 이원론이 되었던 피치못할 사정은 노동가치론이 가사노동을 분석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편리해서 그런게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해보건대 초기 가사노동 논자들이 남성좌파들과의 연대를 위한 일종의 초석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네트워크가 마르크스주의 내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노동가치론이 아니라 '효용'을 공준으로 하는 "외부경제" 개념에 입각하는 편이 더 유용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업주부 혹은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의 "이중 노동"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부불노동으로서 수행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사회적 해악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보건데 이를 외부불경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 운동은 가사노동을 경제화함으로서 이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외부경제의 내부화와 경제주의라는 지적

이러한 내부화를 통해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혹자들은 이를 경제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고 실제로 페데리치도 이런 비판들에 열심히 답변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결국 페데리치는 이것이 수단일 뿐이고 목적은 따로 있는 건데, 이미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가사노동 직업인들을 생산적 노동 계급으로서 결집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가사노동의 가치절하와 주변화를 해결하고자 임금을 받는 가사노동이 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일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이 목표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이 임금을 통해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 우리는 임금을 손에 넣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 노동계급내의 권력관계를 우리와 계급의 통일성에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우리의 목적은 가격설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가사노동과 공장노동, 사무노동이 "비경제적"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80.

결국 생산적 노동과의 단일하고 평등한 대오로 여성들을 혁명적으로 조직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코스타&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해 경제주의라는 비판들에서 예상했던 바와 달리 결국 가사노동의 경제화가 그냥 1차적 수단이자 전술적인 목표였던 것에 불과했던 것이 흥미로웠다.

이는 가사노동의 가치절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이 있던 시기는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속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절하가 일어났고 특히 당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고립된' 전업주부들의 관점에 서는 것이다.

"노동계급 연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전제조건은 함께 일하는 데서 비롯된 네트워크와 유대"로 이 같은 전제조건은 개별 가정에서 일하는 고립된 여성들 사이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로페이트는 1960년대에 이 "고립된" 여성들이 일군 투쟁들의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임대료 파업, 복지수당 파업 등) 로페이트는 우리가 먼저 자본에 의해 조직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조직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 하지만 부엌에서든 공장에서든 자본에 의한 여성노동의 조직과, 이에 저항하는 우리 투쟁의 조직을 혼동할 경우 이는 패배의 지름길이 된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78-79.

어찌보면 지금 한국에서도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 운동은 이런 결집되지 못한 미조직 가사노동자들을 실체적인 대오로써 조직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생각된다.

임금을 누가 지불하는가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들 캠페인에서 임금을 지불하는 주체를 누구로 두고 있는 것일까. 페데리치는 자본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기금을 지불하고 국가가 이를 지급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 우리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손에 넣을 경우, 자본은 우리의 노동을 통제할 감독관을 보낼 것이라고 경고한다. 로페이트는 가정주부를 투쟁할 능력이 없는 피해자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감독관이 이 같은 통제권을 행사하려 할 경우 이에 맞서 문을 닫아 걸고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는 상상은 하지 못한다. 심지어 공식적인 감독관이 없을 경우 우리의 노동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 곧 국가가 우리의 노동을 더욱 직접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이는 현재의 상황보다는 더 나을 수 있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81.

왜 자본이 이를 지불해야 하는가? 페데리치의 입장은 재생산노동이 자본의 잉여가치 축적에 기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각주:16]

물론 이런 생각이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다. 외부불경제 문제가 사회적 효용을 떨어뜨릴 때 이를 내부화하여 대응하는 경우가 어디 한두 사례는 아니지 않은가. 예컨대 탄소배출권 판매를 통해 온실가스에 대한 외부불경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득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경우도 유사하다. 이는 피케티가 최근 주장한 글로벌 자본세[각주:17] 그리고 기본소득도 이런 경우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점차 낮아지는 합계출산률과 미혼인구의 증가를 맞닥뜨린 현재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재생산노동에 대한 임금제도로서 재조명될 일이 영영 없을 거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페데리치라면 아마도 이를 돌봄수당이나 재생산수당 같은 명목이 아니라 임금소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페데리치가 기본소득에 어떤 입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재생산노동의 가치절하 문제를 부불노동-외부경제를 원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이라는 방식은 부정할 것이 분명해보인다.

재생산의 구조조정

페데리치가 70~80년대에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성화되던 시기에 운동을 한 서람이라 그런지 현재의 나로서도 잊어버릴만한 지점을 잘 짚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가사노동의 가치절하의 역사적 맥락이다.

여기서는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커지던 시기가 중요한데, 그 이전에는 복지제도가 이혼가정이든 하위계층가정에게든 여성의 재생산에 매우 중요한 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페데리치가 든 미국의 사례를 들며 이를 재생산의 구조조정이라고 명하고 있다.

사실 여성들은 "똑같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장의 일자리와 (가사노동)을 맞바꾸고 싶어 했는데, (왜냐하면) 시장의 일자리는 월급을 준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73년 이후 여성의 노동력이 기록적으로 확대된 것은 1970년대에 복지혜택이 대폭 삭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89

여성의 고용진입이 커지면서 정부는 복지제도를 축소하고 여성에게 노동사장에 진입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메세지를 주입해왔던 것이다. 페데리치는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게 된 선택 역시 가사노동이 무급노동이라는 점에서 유급노동에서 더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페데리치는 이런 무급가사노동에 처한 여성 개인으로서의 선호와 국가의 복지제도 축소에 따른 문제가 얽혀 재생산 노동 전반에 대한 가치절하가 나타났다고 판단하고 있다.[각주:18] 이로부터 재생산노동은 가치가 낮고 생산노동은 가치가 높다는 식의 인식이 (적어도 미국에서는) 가속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속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가사와 생산의 이중노동 문제가 맞닥뜨리게 되는데, 가치가 낮은 일을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인식이 고조되면서 임금차별과 승진차별이 생산영역에서도 반복되고 이증노동의 과중이 해소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 운동이 국가가 재생산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재정적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 투쟁했더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얼마 안 되는 복지혜택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가사노동문제"에 대한 신식민주의적 해법이 등장하는 일을 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주의 운동이 국가가 재생산노동에 임금을 지불하도록 강제할 경우 이는 가사노동의 조건을 개선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134.

또 다른 문헌을 통해 재밌는 점을 보았는데 바로 가사노동이 부불노동이 된 것은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등장한 노동형태라는 점이었다.

메이야수[각주:19]의 논의에서 가내노동은 농산품 등의 생필품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이며, 가사노동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내노동과 분리되어, 보수가 지불되지 않고 생필품의 소비에 필요한 노동만을 의미하는 독립적 형태의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등장한 노동형태이다.

김원태. (2013). op. cit. p270.

그러니까 산업화 이전의 생산양식은 가내생산이 지배적이었고 가내노동과 가사노동이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부불노동이 되고 임금을 받는 남성노동자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하여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 초기를 가족임금, 가부장임금으로 생각해볼 수 있고 과연 노동력의 가치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대로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으로만 둘 수 있는지 애매해진다. 만약 이것에 손을 대야 한다면 잉여가치를 곧 부불노동으로 보는 전제를 손을 봐야 할 것 같다. 아직은 피상적으로 떠오르는 것에 불과하지만.

결론

아무래도 직접 읽을 기회가 생기니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에 대한 여러 오해가 풀린 것 같다. 이와 함께 가사노동논쟁에 대해 더 구체적인 정리가 되는 느낌도 든다. 사실 페데리치를 읽으려 했던 목적은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재생산노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향후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이원론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호관계를 분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이다. 어쨌든.. 그래서 읽었으나 그러나.. 이 책에서 이런 이론적인 쪽의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했긴 하다. 내가 아직 이런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아서인 것 같고 좀 더 다른 연구들을 많이 살펴보고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다. 특히 초창기 가사노동논쟁을 통해 발전된 이론인 "사회적 재생산론"을 보고 싶다.

[이관 글. 2019-11-29 작성]

  1. Federici, S. (2012). Revolution at point zero: Housework, reproduction, and feminist struggle. PM press. [국역본]혁명의 영점. 황성원. 갈무리. 2013. [본문으로]
  2. Marx. K. (1976). Kapital. Volum I. p274. Pelican, London. 이채언(2009 : p2)에서 참고. [본문으로]
  3. 김원태(2013 : 241)에 따르면 '활동'이라고 하면 모든 사용가치를 만드는 활동들을 포함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생계 때문에 필수불가결하게 생산활동을 해야 하는 '노동'을 구분하기 위해서 '노동'이 적절하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4. Benston, M. (1969).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 Monthly Review, Vol.21, No.4. [본문으로]
  5. Wages for housework Campaign -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Wages_for_housework [본문으로]
  6. 정성진. (2013). 가사노동 논쟁의 재발견: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페미니즘의 결합 발전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연구, 10(1), 12-48. [본문으로]
  7. Dalla Costa, M. 1972.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in M. Dalla Costa and S. James.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Bristol. 다만 달라 코스타의 설명은 자본축적에 필수적인 노동력의 공급이라는 점에서 이를 '생산적'이라고 정의한다는 점에서 본래 마르크스주의의 가치 생산과 결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본문으로]
  8. Seccombe, W. 1974.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83. [본문으로]
  9. Benston, M. 1969.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 Monthly Review, Vol.21, No.4. [본문으로]
  10. Himmelweit, S. and S. Mohun. 1977. “Domestic Labor and Capital.”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1, No.1. [본문으로]
  11. Molyneux, M. 1979. “Beyond the Domestic Labour Debate.” New Left Review, No.116. [본문으로]
  12. 정성진. (2013). ibid. [본문으로]
  13. 이채언. 2009. “노동력가치이론과 상품가치이론 사이의 논리적 정합성에 관한 연구.” 사회경제평론 32:167–93. [본문으로]
  14. 김원태. 2013. “가사노동(논쟁) 비판.” 진보평론, 226–81. [본문으로]
  15. Vogel, Lise. 2013.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본문으로]
  16.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125. [본문으로]
  17. Piketty, T. (2014). Capital in the 21 Century. Trans. Arthur Goldhammer. Belknap Press. (국역본). 21 세기 자본. 글항아리.2014. [본문으로]
  18. Federici, S. (2012). 국역본. op. cit. p89-91. [본문으로]
  19. Meillassoux, Claude, (1989). 자본주의와 가족공동체: 여성, 곡창, 자본. 김봉률 역, 까치, (참고로 이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 클라우드 메이야수의 아들이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로 잘 알려진 큉탱 메이야수이더라. 이름 듣고 깜놀했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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