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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부끄 포스터

일드 도망부끄 소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무급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잘 묘사하고 있는 일본드라마이다.

주인공 모리야마 미쿠리는 심리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파견사원으로 취업하여 일하다가 계약만료를 당하면서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고민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사 일에 재미를 느낀다는 점을 알게 되고 또 다른 주인공이자 S/W 엔지니어인 츠자키 히라마사의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에게 제안 받아 일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미쿠리의 부모님들이 매우 먼 시골로 이사를 결정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그 시골 생활에 자신이 버틸 수 없을 거란 걸 느낀 미쿠리는 츠자키와 계약결혼을 하고 가사노동에 대한 서비스로 소득을 얻는 일명 실질적으로는 사실혼 관계로서 "고용-피고용 관계"라는 망상을 하게 된다. 평소 '프로독신남'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츠자키는 이 망상을 듣고 그렇게 할 것에 합의하게 된다. 즉 가사노동 서비스를 받고 임금을 지불하는 고용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이런 독특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가사노동 논쟁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페미니즘 간에 이루어진 '가사노동 논쟁'이 떠올랐다. 이 일드를 통해 해당 논쟁에 대해 재고찰해보기에 앞서 이 논쟁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가사노동 논쟁이란 노동가치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예컨대 노동력의 가치라 함은 전통적으로 노동력이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가치를 재보충해주는 개념으로 본다. 따라서 상품생산과정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일명 '재생산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이와 달리 Dalla Costa(1972)[각주:1],  Seccombe(1974)[각주:2]는 가사노동이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생산적 노동력인 인간을 생산한다는 점 때문에 가사노동은 생산적이며 잉여가치를 착취당한다고 주장했고 논쟁이 촉발되었다.

또 다른 방향에서 가사노동 문제에 접근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일명 이중체계론으로,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과 동일시 한 점을 비판하면서 잉여가치 증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보이려 하는 입장이다. Molyneux(1979)[각주:3]는 보육, 가사노동이 세대와 세대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중요시한다. 이는 곧 사회재생산이론(social reproduction theory)으로 발전하게 된다.

임금가사노동자 미쿠리 찡

미쿠리의 모습

미쿠리는 츠자키와 고용관계에 있다. 그녀는 가사노동을 하고 츠자키에게 그 대가로 임금소득을 받는 가사노동자이다. 이런 형태라면 마르크스경제학의 전통적인 노동력의 가치에 부합한다. 모찌론 가사노동도 노동시장에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피고용자인 미쿠리는 고용자인 츠자키에게 가치를 착취당하는가?

이는 마르크스경제학이 노동력의 사용가치가 잉여가치의 생산이라는 점을 돌아보면 대답은 그렇지 않다고 해야겠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이윤을 얻기 위해 고용한다. 그리고 여기서 노동의 소외가 발생한다. 상품생산에 투입된 노동은 상품교환 속에서 소외된다. 하지만 이와 달리 미쿠리는 노동의 소외가 발생하지 않는다. 상품교환 내부로 반은 편입되긴 한다. 왜냐하면 미쿠리는 츠자키에게서 얻은 임금소득으로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츠자키가 미쿠리의 가사노동에 대한 노동력을 구매하고 상품시장에서 이 서비스상품을 파는 형태는 아니다.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그것이 실물상품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무형적인 서비스 역시 판매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가사대행 서비스 노동이 자본가에게 고용되고 이를 구매하는 제 3자인 소비자로 구성된 상품시장의 경우에만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를 착취당한다.

결론적으로 미쿠리의 예는 잉여가치론의 분석 영역의 외부에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잉여가치론의 분석영역은 노동력상품과 상품생산 영역으로 한정된다. 그렇다면 전업주부의 무급가사노동은 "가치"를 착취한다기보다는 "사용가치"를 착취당한다고 봐야하며 마경은 이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내 생각에 이 문제는 합리적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분석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런 논의는 김진욱(2005)[각주:4]에 따르면 Gershuny(1994)[각주:5]의 협조적 적응모형(Adaptive Parnership), 이중노동부담(Dual Burden) 가설[각주:6] 등이 있다. (이중노동부담 가설의 경우 이중체계론에 속한다)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의 가사노동 논쟁에 대한 태도, 그리고 노동력의 세대 간 재생산 문제의 중요성

위에서 미쿠리의 예를 마르크스경제학의 잉여가치론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예를 보이면서 우리는 차원이 다른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전업주부의 무급가사노동을 분석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마르크스경제학계는 가사노동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문제를 자신들의 분석 외부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는 정당해보이긴 하다. 하지만 이중체계론-사회재생산론의 경우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가치는 전통적인 해석처럼 과연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해서만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필요성은 마경학계 내에서 관심있게 다뤄지고 있지 못하다. 이는 국내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이 가사노동을 다룬 논문 정성진(2013)[각주:7]과 이채언(2009)[각주:8]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노동력의 가치 개념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서로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것까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편의적으로 다루는 한 예가 있다.

정성진(2013)이 벤 파인(2012, p173-174)[각주:9]을 따라 후불임금-생산가격 모델을 통해 이중체계론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애초부터 모형의 가정이 불합리한 상황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이도록 하자.

(1) $p=(1+r)pA+w_{1}l_{1}+w_{2}l_{2}$

여기서 $w_{i},l_{i}$는 각각 임금률과 노동시간이며 $i=1,2$에서 1은 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자, 그리고 2는 가사노동자를 의미한다. 정성진은 무급가사노동일 때 ($w_{2}=0$) 잉여가치가 증대한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델 자체가 애초부터 임금률 계수가 0이면 가사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이윤율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게 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건 분석이라 할 수 없다. 선형생산 모델(후불이든 선불이든 상관이 없다)은 가사노동 문제를 다루는데 부적절하다. 이를 검토하려면 모델을 바꿔야 한다. (누군가 해주겠지. 퍽!)

또 하나 지적할 사항은 마르크스주의와 이중체계론-사회재생산론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핵심원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한 쪽은 노동력의 생산, 다른 한 쪽은 자본축적을 들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이 이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가 않는다. 이윤율 저하경향이 중요한가? 경기변동론이 중요한가? 산업예비군이 중요한 문제인가? 이 문제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가질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다. 어쨌든 둘 간의 논의에서 이것이 양보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무엇이 핵심적인 모순인가에 대한 대답은 현실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예시들을 언급한 이유는 마르크스경제학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프레임을 유지한 상황에서 이중체계론-사회재생산론을 다루려 하는 한 증거로서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당한 논의가 아니다.

고용관계에서 공동경영책임으로

다시 도망부끄 이야기로 돌아오자.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미쿠리는 파견사원→백수→가사대행도우미→전업주부→겸업주부로 계속 직업이 뒤바뀐다. 신사에 야외시장을 개최하기 위한 상근자로 겸업을 하기 시작한 미쿠리가 가사노동에 투입할 노동시간이 부족하게 되면서 츠자키와 가사노동을 분담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은 미쿠리와의 계약이 파기되고 일반적인 결혼관계가 되면서부터 발생하게 된다.

츠자키가 기존에는 구석구석 깔끔하고 그랬는데 요새 청소의 질이 떨어져간다고 지적할 때 미쿠리는 말한다.

"일이었을 때는 그랬겠죠.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원래 세심한 성격 아니거든요."

어쨌든 여기에서 서로가 약속한 부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갈등이 빚어진다. 사실 부부관계에서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남성들의 가사노동 방기가 주로 일어날 것이고 결국 여성이 가사노동을 대부분 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도 아직 한국의 경우 가사노동의 남성 분담에서 세계 꼴찌인 걸 보면 그렇다.

이 둘을 다시 이어준 것은 결국 가사노동은 호혜적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불하라"는 메시지는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 역시 존재했다. 그것은 성별분업의 역할을 강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상품교환으로 할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성별분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논의로 옮겨왔다.

가족을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란 문제에 대해 도망부끄는 대강의 답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재생산이다. 각자가 힘든 상황에 처할 때 힘이 되고 무한정 믿어주는 존재라는 답. 물론 너무 서정적인 메세지라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재생산의 문제가 매우 까다로운 문제라는 걸 알게는 해준다. 생산 영역에서 분석을 하는 잉여가치론이 생산영역에서 벗어난 자연적인 인간이 살아가는 재생산 노동(가사, 보육, 여가 등)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경이 가사노동 문제를 다룰 때 여기서부터 인정하고 출발해야 하지 않나. (사실 비판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노동력이 생산되는 것은 과연 노동력의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가족을 유지시키는 가치는 어디서 공제된단 말일까? 이에 대한 대답이 요청된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사회재생산론은 이에 대해 대답하려고 하고 있지만 마경은 그렇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 위치한 자신들의 처지를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다시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이관 글. 2018-06-11 작성]

  1. Dalla Costa, M. 1972.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in M. Dalla Costa and S. James.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Bristol. [본문으로]
  2. Seccombe, W. 1974.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83. [본문으로]
  3. Molyneux, Maxine. "Beyond the domestic labour debate." New Left Review 116 (1979): 3. [본문으로]
  4. 김진욱. "근로기혼여성의 이중노동부담에 관한 실증연구." 한국사회복지학 57.3 (2005): 51-72. [본문으로]
  5. Gershuny, Jonathan, Michael Godwin, and Sally Jones. "The domestic labour revolution: a process of lagged adaptation." The social and political economy of the household (1994): 151-197. [본문으로]
  6. Hochschild, Arlie, and Anne Machung. The second shift: Working families and the revolution at home. Penguin, 2012. [본문으로]
  7. 정성진. "가사노동 논쟁의 재발견." 마르크스주의 연구 10.1 (2013): 12-48. [본문으로]
  8. 이채언. (2009). 노동력가치이론과 상품가치이론 사이의 논리적 정합성에 관한 연구. 사회경제평론32, 167-193. [본문으로]
  9. Fine, B. (2012). Women's employment and the capitalist family. Routledg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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