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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럴드 앨런 코헨의 "생산력 우위 태제(이하 <태제>)"에 대한 소개를 위해 기획한 시리즈이다. 코헨의 논의들을 요약하기는 매우 버거운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그의 논의들을 여러 시리즈로 나누게 되었다. 이는 나의 올해 2017년의 학습계획 중 하나로 손꼽은 것이고 나에게 이를 정리할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태제>를 검토한 내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번 글로서 생산력 우위 태제 시리즈는 끝난다.

이 글은 코헨(1981)[각주:1]에 나오는 제 8장 토대와 상부구조, 권력과 권리(p369-414)에 대해 정리 및 노트한 것이다.

서론

여태까지 우리는 생산력과 경제구조, 그리고 생산력 우위 태제에 대해 소개해왔다. 그러나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주장은 바로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1부와 2부에서 이를 검토하지 못했다. 1부에서 짤막하게 다룬 바와 같이 경제구조는 상부구조의 토대이다. 그러나 경제구조에 상부구조가 포함된 것은 아니며 둘은 외재한다. 둘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둘은 왜 왜재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 상부구조

1-1. 상부구조란 무엇인가

상부구조에 대한 몇 가지 정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각주:2]

(1) 상부구조 = 모든 비경제적 제도

(2) 상부구조 = 경제구조의 성격에 의해 그 특성이 설명되는 비경제적 제도들

(3-1) 상부구조의 특성은 대체로 경제구조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

(3-2) 비경제적 제도는 대체로 상부구조적이다.

여기서 (1)과 (2)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함축적 정의라 볼 수 있다. 코헨이 덧붙이는 것은 바로 (3-1)과 (3-2)이다. 상부구조는 비경제적이다. 그러나 그 비경제적 특성은 경제구조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결정된다). (1)과 (2)의 정의를 (3-1)과 (3-2)가 보완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과 (3-2)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비경제적 제도는 대체로 상부구조적이다."와 "상부구조는 곧 모든 비경제적 제도이다."는 문장은 부분과 전체를 각각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헨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주장은 실질적으로 (3-2)라고 주장한다.

1-2. 상부구조는 왜 존재하는가

상부구조는 비경제적이다. 그것은 법과 명시적인 권력, 제도를 포함하게 된다. (우리는 당분간 이데올로기의 경우 상부구조와 전혀 다른 경계인 것처럼 다룰 것이다) 그런데 상부구조는 왜 존재하는가? 아니 경제구조는 왜 상부구조를 필요로 하는가? 각 생산관계에서의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명시적으로 제도화하고자 법을 세웠다.

제도란 규범과 체계를 말하는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배계급이 의도한 바대로 일정한 방식으로 사회구성원들이 움직이도록 구속력을 갖는 법적 체계에 근거하여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가 곧 특정한 생산관계를 긴 시간동안 유지시켜주는 것이다.

2부에서 다루었던 생산력 우위 태제에 기초하여 이를 설명해보자.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그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적합할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부구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경제구조가 상부구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법과 제도는 곧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구조는 상부구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1-3. 권리와 권력의 분리

위에서 우리는 법과 제도는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문에서 코헨은 "법적 제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근대국가가 법에 근거한 제도로서 한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따라서 이 챕터에서는 법적 제도라 할 것이지만 정의상 제도 전체는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구분되는 것은 아님을 명심하자.

우리는 1부에서 경제구조를 소유권을 가지고 설명하였던 바 있다. 이 소유권이란 법적 영역을 통해 실질적인 권리를 얻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권리와 경제구조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결국 권리는 권리이고, 경제는 경제다. 그리고 두 개념은 뒤섞일 수 없다.[각주:3]

플레하노프의 지적대로 보자면 왜 경제구조가 법적 성격에 의해 소유권이 규정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와 경제구조는 왜 뒤섞일 수 없는가? 코헨은 (3-1)에 따라 상부구조가 경제구조에 의해 설명되기 때문에 그리고 상부구조는 경제구조와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를 통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왜 상부구조는 경제구조와 분리되어 있는가. 왜냐하면 생산관계는 소유관계에 의해 설명되기 때문이다. 1부에서 다루었듯이 우리는 노예, 농노, 노동력, 자유생산자로 생산관계를 소유관계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소유관계는 생산관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소유란 무엇으로 정의되고 있는가. 코헨은 소유를 권리의 향유로 정의내린다. 그렇다면 소유의 권리는 곧 조응권력(matching power)이다. 이제부터 코헨에 따라 우리는 생산관계는 소유관계에 '조응하는(match)' 것으로 묘사할 것이다.[각주:4]

코헨이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밟는 이유는 소유관계를 법적 용어와 분리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유관계는 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필요성 역시 없으며 이는 근대국가 이전의 경제구조까지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이 든다.

어쨌든 위에서 다룬 것들에 입각하여 생산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

  생산수단 또는 노동력을  
1   사용할 권리 사용할 권력
2   철회할 권리 철회할 권력
3   타인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권리 타인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권력
4   양도할 권리 양도할 권력

[표 1] 권리와 권력의 조응[각주:5]

권력은 뭐든지 강제로 할 수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코헨이 코멘트를 하지 않은 3의 경우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자. 어떤 이가 골목길에 사비를 들여 만든 가로등이 있다고 하자. 가로등 아래에 이웃들이 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골목길을 차단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웃들이 이용하는 골목길은 공공재이고 이웃들은 자신에게 이 길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권리 자체는 언제나 잠재적으로 부유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충돌하기도 한다. 코헨은 권리에 대해 정의내리지 않고 있으나 내가 보기에 코헨이 권리를 말할 때 대체로 구속력이 없으며 잠재적이고 부유하는 "Φ룰 사용해야한다."는 당위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권력은 무엇인가? 코헨에 따르면

비규범적인 곳에서 "~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하여 Φ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은 Φ에 대한 권력을 가진다.[각주:6]

우리는 권력을 지배자, 상위권자를 상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권력을 말하고 있다. 1부의 소유관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철회할 권력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노동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하여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노동력을 철회할 권력을 갖는다. 다른 예로 노예는 노동력을 철회할 권력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철회할 권리는 갖는다. 위에서 이미 권리가 잠재적인 특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반대로 권력은 이러한 잠재하는 권리와 조응해야만이 가능하다. 이는 형식논리에 의한 귀결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철회할 권력을 갖는다. 그러나 노동력을 철회할 권리가 없다고 한다면 모순되기 때문이다.

1-4. 생산관계는 소유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권력을 정의함에 있어 법적 측면을 이와 분리시켰고 우리는 1-3 챕터에서 살펴본 바 있다.

법적 측면을 탈각시킨 채 생산관계를 묘사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묘사한 생산관계가 어떻게 소유관계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각주:7]

소유관계는 생산관계를 뒷받침한다.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진하거나 재가하기 위해 변화한다. 생산관계는 경제구조의 일부이므로 경제적 성격을 갖으며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변화한다. 하지만 소유관계는 생산관계 내에서 사회의 안정을 위해 변화한다. 때로는 경제구조의 변화가 법개정보다 먼저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한국의 독재정권 시절의 근로기준법과 같이)그 역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대체로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변화에 의해 변한다. 따라서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에 의해 설명된다.

혁명은 법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각주:8]

그러나 아래에서도 다루겠지만 혁명 뒤에는 법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토대는 상부구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5. 토대는 상부구조를 필요로 한다

인간사회에서 힘(might)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또는 심지어 형성되기 위해서는 빈번히 권리를 필요로 한다. 권리 없는 힘은 불가능하거나 쓸모없거나 불안정하다. 생산력에 대한 권력이 이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적절한 사례이다. 그 같은 권력의 행사는 법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에는 그리 안정적이지 못하다.[각주:9]

생산관계는 상부구조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적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상부구조의 존재는 바로 생산력의 일정수준의 유지와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경제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의 안정적인 작동을 위해서라도 상부구조를 필요로 할 것이다. 따라서 토대는 상부구조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코헨은 경제구조와 생산력 모두를 칭하기 위해 '토대'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이데올로기

이 챕터는 여태까지 우리가 배운 바를 토대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들에 대해 필자인 내가 코멘트를 하기 위해서이고 이를 코헨이 다룬 바는 없으므로 대체로 나의 생각에 기초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나는 코헨의 상부구조의 개념이 이데올로기론들과 모순되지 않고 잘 양립될 수도 있음을 목적으로 하고자 한다. 참고로 코헨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대해 자신이 기반한 논리실증주의의 기준에서 볼 때 모호하다는 점을 들어 그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각주:10]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코헨이 기반하는 전통적 역사유물론은 정세분석 차원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데올로기론을 말할 때 엄밀하게 잘 닦여진 코헨의 역사유물론을 이용한다면 중구난방으로 사용되어온 '경제'에 대한 개념을 엄밀하게 자리잡도록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1. 과잉결정

알튀세르는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으로 러시아 혁명이 왜 가능했는가를 해석한다[각주:11]. 그것은 러시아가 세계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고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과잉결정의 최종심급은 바로 경제라고 정의하는데 알튀세르는 일명 '경제주의'를 탈각하거나 중심으로 두지 않으면서 이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사용했다.

허나 코헨의 상부구조의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는 상부구조는 경제구조가 아니라고 하였다. 상부구조는 대체로 비경제적 제도이지 경제구조가 아니며 "경제적"인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경제구조는 상부구조를 필요로 한다. 상부구조는 경제구조가 생산력에 적합한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갖는다.

예컨대 생산력의 발전을 최대로 끌어올리게 되어 더는 끌어올릴 수 없는 '경화증'에 걸린 생산관계를 가정해보자. 생산관계가 대체될 수 있는 건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태내에서 새로운 생산관계가 성숙되어야 할 것이다. 알튀세리언들은 자본주의적 모순, 계급 모순이라는 (헤겔적으로 보이는) 묘사에 의존하여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이 모호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부정할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질을 말하는 것인가? 2부에서도 다룬 바와 같이 우리는 공황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대체에 우발성을 더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태내에서 발전했던 새로운 생산관계 역시 함께 몰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부구조의 최종심급이 경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구조가 상부구조를 필요로 하며, 그것이 생산관계의 안정적인 기능에 부합한 경우 경제구조는 상부구조를 설명하며 바로 그런 관계가 명확하다면 이는 옳다.

다른 한편으로 과잉결정을 일종의 부정적인 영향, 즉 공황에 의해, 계급 모순에 의해, 자본주의 모순에 의해서 발생되는 어떤 상부구조에 대한 지진, 흔들림, 와해를 뜻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러한 정의가 더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반대의 경우로서 혁명이 불가능한 과소결정이란 개념을 논했기 때문이다) 이는 상부구조 자체가 비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옳다고 본다.

2-2. 소비에트

과잉결정이 소비에트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라면 또한 소비에트 혁명은 코헨의 생산력 우위 태제와 상반된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코헨은 소련 붕괴 이후 제 15장. 소련 붕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글[각주:12]을 추가하였다. 이를 살펴보자.

코헨은 소련 붕괴 이전에도 소비에트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생산력 우위 태제에 입각하여 보면 생산력의 발전수준이 미약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상부구조가 비경제적이며 생산력과 외재한다는 점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코헨은 소비에트 혁명을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의해 태내에서 성숙된 새로운 생산관계가 대체된 사례(즉 생산자들)가 아니라 "볼셰비키 지도자들 그리고 때로는 바로 단 한 명의 지도자에 의해 지배되었다"[각주:13]고 말하고 있다.

만약 생산력의 불완전한 발전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수립하려 한다면 "종래의 모든 불결한 업무"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각주:14]

사실 레닌 스스로도 러시아혁명에 의해 사회주의가 잘 수립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동시다발적인 세계혁명을 일으켜 선진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지원을 바란 것이다. 특히 전쟁 중이었던 독일에서 독일사민당에 내심 기대가 컸었다. 그런데 독일사민당의 이론가 카우츠키의 반대에 얼마나 놀랐는지 "배신자 카우츠키"[각주:15]라는 매우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제목의 팸플릿까지 출판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레닌 생전까지 지속적으로 국제주의를 놓지 못한 것이었다. 이후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론"을 주장하면서 정세는 다르게 변화했다. 이것은 그들의 현실적인 조건 상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2-3. 상품물신주의

물신주의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전에 쓴 [G.A. 코헨. 물신주의, 공산주의, 분업의 폐지에 관한 노트]를 참고하라.

보통 이데올로기론들은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주의론을 중시한다. 그런데 물신주의라는 것은 상부구조, 또는 이데올로기인가? 코헨은 물신주의를 상부구조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렵지는 않다.

(4) 상품물신주의는 경제적 현상이다. 그것은 상품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구조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물신주의는 경제구조의 일부이다.

(5) 상품물신주의는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를 보호한다. 생산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상부구조의 역할이다.  따라서 상품물신주의는 상부구조이다.

여기서 우리는 (5)를 부정한다. 우리는 위의 (3-2) 문장에서 "비경제적 제도는 대체로 상부구조적이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런데 물신주의는 경제적 현상이다. 왜 경제적 현상인가? 그것은 상품교환이라는 사회적 형식에 유래한다. 사회적 형식은 경제구조의 일부이다. 따라서 이는 경제적 현상이다. 또한 상품물신주의는 제도가 아니다. 왜 제도가 아닌가? 물신주의는 실재를 은폐하는 것이 목적이며 은밀하게 작동한다. 이것이 법적 제도화된다는 것은 은밀한 작동을 방해할 것이고 실제로도 물신주의는 제도화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신주의를 상부구조로 보는 견해를 부정한다. (이에 대해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약간은 유보적인 입장으로서 (3-2) 문장이 허용하는 "경제적 제도는 어느 정도는 상부구조적일 수 있다." 정도의 단서를 달 것이다. 그러나 물신주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을 약한 가능성으로 두도록 하겟다)

이러한 우리의 견해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론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이들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경제적 현상, 비경제적 현상으로서 병렬적으로 구분시키면서 사회적 효과로써인 이데올로기로 틀지운다면 그것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코헨의 상부구조와 경제구조를 외재하는 관계로 보는 관점은 이들과 잘 양립하기 어려운 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론을 위해 이러한 개념을 희생할 때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상품물신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생산관계에서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경제적 현상인가? 답은 그렇지 않다. 종교는 경제구조와 외재하며 단지 중세유럽을 지배하는 상부구조가 되었던 이유는 영주-농노라는 사회구성체에 조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결론

우리는 이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코헨에 대한 소개와 검토들을 모두 마칠까 한다. 그가 닦아놓은 생산력 우위 태제, 아니 역사유물론은 분명 엄밀성에 장점이 있겠으나 실제 정세분석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가 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현실참여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음을 밝힌다. 그러한 역할이 결국 이데올로기론들일테고 이것은 어느 정도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의 장점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이데올로기 이론가들이 역사유물론에 대해 혼란을 주었다는 점 역시 우리는 확인한 바 있다. 그로써 얻을 수 있는 매리트는 얼마나 컸을까. 나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헨은 이데올로기 이론가들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나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현실의 우리는 장기적인 역사이론이 아니라 초단기를 살아가며 변화시켜야 하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사회주의 운동들의 미래전망이 대체로 윤리적이고 도덕적 실현에 의존하는 현실이 이데올로기 이론의 영향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생산력에 대해 무지하며 이러한 생산력을 이용하고 끌어올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그에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 자본주의 태내에서 성숙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찾는데 무관심하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은 분명 아직 그러한 새로운 생산관계가 발견되지 못할만큼 협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아직 자본주의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생산력을 더 높이 끌어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코헨 역시 운동가로서의 긍정, 전망들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 허나 그는 현재의 생산력 수준에 적합한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생산자들의 의식을 교양하거나 정부차원에서의 정치투쟁에 집중되는 현상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상황이 우리를 과연 미래 전망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인가? 혹은 염세적인 태도로 만드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미래를 긍정하기 위해 현재의 자본주의의 위치가 얼마나 튼튼한지 알 수 있다면 그로써 우리는 "진지전"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하고 커다란 정세가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는 믿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재앙이 될 수도 있음도 염려된다.

[이관 글. 2017-07-24 작성]

  1. Cohen. G. A. "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ce." Oxford: Clarendon Press, 1981. (국역판)"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역사유물론 옹호." 박형신, 정헌주 옮김. 한길사. 2011. [본문으로]
  2. Cohen. G. A. 1981. (국역판) ibid. p370. [본문으로]
  3. Plekhanov, Georgiĭ Valentinovich. 1956. "The development of the monist view of history." p35 [본문으로]
  4. Cohen. G. A. 1981. (국역판) op. cit. p373. [본문으로]
  5. Cohen. G. A. 1981. (국역판) ibid. p375. [본문으로]
  6. Cohen. G. A. 1981. (국역판) ibid. p374. (문장을 이해가 쉽도록 다듬었기에 원문과 조금 다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는 능력"(able)이 비규범적인 곳에서 어떤 사람이 Φ를 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 사람은 Φ에 대한 권력을 가진다] ) [본문으로]
  7. Cohen. G. A. 1981. (국역판) ibid. p382. [본문으로]
  8. Marx, Karl. 1862~3. "Capital." p751. Moscow, 1961. Vol. I (1962): 609. [본문으로]
  9. Cohen. G. A. 1981. (국역판) op. cit. p389. [본문으로]
  10. Cohen. G. A. 1981. (국역판) op. cit. p32-33. [본문으로]
  11. Althusser, Louis. 1965. "Pour marx." [본문으로]
  12. Cohen. G. A. 1981. (국역판) op. cit. p605-613. [본문으로]
  13. Cohen. G. A. 1981. (국역판) ibid. p608. [본문으로]
  14. Marx, Karl, and Frederick Engels. 1846. "The German Ideology (Moscow, 1968)." p46. The ideas of the ruling class are in every epoch the ruling ideas (1969): 61. [본문으로]
  15. Lenin, Vladimir Ilʹich. 1918. "The Proletarian Revolution: And Kautsky the Renegade." Modern Books Limited, 192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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