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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론

가사노동과 마르크스주의

현정경 2021. 5. 2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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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와 하버마스

낸시 프레이저의 "전진하는 페미니즘"을 읽다가 가사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이전에도 생각했던 내용을 끄적여본다.

프레이저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범주 프레임이라는 것이 있다고 언급한다.[각주:1] 즉 상징적 재생산과 물질적 재생산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때 자녀양육의 과정을 상징적 재생산, 임노동과 같은 과정을 물질적 재생산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이(인용자:하버마스)에 따르면 둘 중 어느 한 가지가 ㅂ베타적 혹은 우선적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 영역을 구성하는 행위와 실천은 그에게 물질적 재생산 활동으로 간주된다. (...)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내 영역에서 여성들이 무임금으로 수행하는 자녀양육 행위와 실천(괄호 생략)은 상징적 재생산 활동으로 간주된다. 그의 관점에서 이런 행위와 실천은 사회화와 상징적 재생산 기능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각주:2]

프레이저는 이러한 구분에 의문을 표한다. 자녀양육 노동은 분명 사회적 정체성을 재생산하기도 하지만 음식의 조리 행위 역시 있기 때문에 물질적 재생산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마찬가지로 하버마스가 물질적 재생산 활동으로 간주하는 임노동 영역 역시 사회적 정체성을 재생산하는 활동도 포함될 수 있다. 정치관련 종사자, 마케터 등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그녀는 하버마스의 구분 자체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며 사회학적 이득 역시 없다고 주장한다.

 

신비화를 폭로하는 비판 이론 그리고 냉소주의

프레이저 자신이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미리 밝혀두었듯이[각주:3]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이론에 기초하여 하버마스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의 종속을 은폐하여 '신비화'함을 폭로하는 방법이다. 하버마스의 가사노동의 상징적 재생산으로 간주하는 판단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을 폭로하기 위해서가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하버마스의 구분이 가내 영역을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전략이 암묵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각주:4]

이런 논증은 정확히 마르크스주의 비판적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대체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로도 정체화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글들(사실 프레이저와 치즈코밖에 모르지만..)이 이런 방법을 선호한다. 물론 이런 방식은 강렬한 인상을 남길지 모르지만 최근들어 프레임을 폭로하는 전략은 상대방에 대한 타격력이 무뎌졌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이 납득이 되기도 했다.

지젝이 이러한 무뎌짐을 냉소주의적 주체로 규정하고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 지 알지 못하나이다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t."라는 성경의 구절을 가지고 비꼬아서 "저들은 잘 안다"고도 했는데, 즉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자들은 그것이 무슨 행위인지 매우 잘 알고는 있지만 그러한 행위와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란주점에 같이 가주지 않는 친구에게 "왜 착한 척 해?!"라고 응수할 수 있는 그 행위는 분명 여성의 육체를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것이 팽배한 상황에 토대를 둔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사실 그것이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잘못된 행위임을 매우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냉소주의적 주체를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 알면서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일종의 전략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냉소주의 속에서 노동가치론을 연구하는 나 자신 역시도 고민이 드는 지점이다. 노동가치론은 잉여가치를 노동자에게서 착취한다고 폭로하는 비판 방법에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이제 노동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자본가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정상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달리 노동가치론은 체제의 변혁을 꾀하기 때문에 이와 다르게 어떤 식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 드는 지점.

다른 한편 여성주의에서 여성종속을 신비화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수행하는 가부장적 주체들의 냉소주의에 대해 가장 좋은 전략은 미러링이었던 것 같다, 한남이라는 말은 여전히 남성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단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런 전략은 일종의 '정상적인 개인'을 지시하는 측면이 있다. 한남이란 말이 불쾌함을 주는 것은 분명 개새끼라는 욕 이상의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 바로 도덕적, 사회적으로 악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남성이 그렇지 않다"고 응수하는 이유도 이런 암묵적 프레이밍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러한 미러링은 개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정상 개인'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여성을 때리지 않는 남성", "여성을 자유로운 인격으로 보는 남성"으로 정체화된다. 게다가 이성애자 여성들의 경우 연애의 조건을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지의 여부로 둔다는 말도 있기도 하다.

이것이 문제라고 보지는 않지만 어떤 한계를 운동의 측면에서는 분명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 경우가 TERF(트랜스를 배제하는 급진 페미니즘)의 경우일 것이다. 이것은 진짜여성논쟁도 마찬가지의 시류에 해당한다. 상호교차성의 경우 적어도 사회적인 문제의식으로 연결될 소지를 주긴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을 진짜 여성으로 보는 방식은 여러모로 '정상 개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극단적인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착한 남성으로는 사회를 변혁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생물학적 남성은 진짜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적대'를 통해 경계를 명확히 하여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급진 페미니스트로 불리기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가사노동과 노동가치론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경제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글을 보고 든 생각들을 써보기로 하겠다. 바로 가사노동에 대한 것이다.

프레이저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자녀양육과 관련한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녀가 노동가치론에 대해 조금은 혼란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마르크스정치경제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하는 근본가정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노동력이라는 것은 상품이어야 한다. 즉 교환가치가 있고 거래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사노동은 노동력 상품으로 교환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프레이저가 그것을 여성의 양육노동에 한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를 노동력 상품이라는 정의에 부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가사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프레임을 정확하게 꼬집어 비판하려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접근하게 된다.

  • 첫번째. 잉여가치 착취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예컨대 출산을 '생산'이라고 보거나 혹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의 일부라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은숙 씨의 참세상주례토론회 발표문인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각주:5][각주:6][각주:7]

    최근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형성된 노동력 시장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직접적으로 물질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활동하는 경우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포함된다면 가사노동 역시 생산적일 수 있다.

    다만 가사노동에 대한 노동력 시장은 왜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마르크스경제학은 답할 수 없다. 단지 상식의 수준에서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요인들에 의한 압력이라고 말하는 수준이겠다. 당연하게도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가부장적 구조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력 상품시장의 형성은 이전의 노예제와 농노제 체제보다 진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러한 방해요인들에 관심이 가게 되기도 하는데 가부장 구조가 그것을 방해했다기 보다는 자본가들이 가부장 구조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어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공장주는 '타고난' 손재간과 참을성을 갖춘 여성 재봉사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이런 덕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여성의 일을 '반숙련' 노동으로 분류해 노동력을 쉽게 통제할 뿐 아니라 여성 임금을 일반 남성 노동자보다 훨씬 낮게 유지한다. 또한 방글라데시 의류 공장 노조의 주도권은 남성이 쥐고 있기 때문에 공장주와 정부가 정한 위계적이고 성별 분업적인 임금 체계 또한 별다른 저항 없이 유지된다.[각주:8]

    결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양육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규정하려는 입장에 대해 다시 언급해보자.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다고 생각된다. 양육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라고 규정하게 된다면 이는 노동자 계급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가부장제에 압제당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프레임으로 논의를 새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편향된 입장에서의 규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에 대한 내 견해는 생산적 노동의 규정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가치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거기서 답을 낼 수 있어보았자 그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말할 뿐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가능성이 은폐되는 효과가 상존한다.

    나는 이것을 트랜스크리티컬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상호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이기도 하다. 인용한 커스터스의 말과 프레이저가 말한 가사영역과 사회경제의 분리는 가부장제의 강화이면서도 자본에 이득을 제공하기도 함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제 구조가 상호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과 젠더의 상호교환적인 방식을 적절하게 비판하려면 어느 것이 더 중대한가의 문제는 거의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어느 한 쪽이 해결된다고 해서 다른 쪽이 자동 해결된다고도 볼 수 없으면서도 이 둘이 지배이데올로기가 적절히 교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에게 타자이기 때문에 트랜스크리티컬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트랜스크리티컬이라는 점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인지까지는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좀 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라 하겠다.

    [이관 글. 2017-12-09 작성]

    1. 낸시 프레이저. 2017. "전진하는 페미니즘". p36. 임옥희 옮김. 돌배개 [본문으로]
    2. ibid. p38. [본문으로]
    3. ibid. p35. [본문으로]
    4. ibid. p51. [본문으로]
    5. [/footnote]을 참고할 것.
    6. 두번째는 매우 쉽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구분되어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들은 이런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경우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가정을 유지하면서 가사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포함하려는 하나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첫번째의 경우는 마르크스경제학을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되면서도 마르크스경제학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노동력의 가치는 '재생산'이라는 정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도 이것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주어져있다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회적'이니 '문화적'이니라는 것이 이렇듯 여러 자의적인 규정들에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마르크스가 말하였듯이 이론이 자신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런 '확장'이라는 의미를 잘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사노동과 물질적 재생산

프레이저의 논리를 보면 그 암묵적 가정이란 결국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용가치의 입장에서 가사노동을 보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대응하고 있는 하버마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하버마스의 입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가사노동이 물질적 재생산과 다르지 않다는 논증을 펼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하버마스를 염두한 비판이지만,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마르크스주의에는 노동가치론과 역사유물론이라는 세계를 보는 두 관점이 있다. 역사유물론의 관점은 역사를 물질적 재생산을 기반으로 보는 것이며,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라는 역사 속에서 한 특수한 경제체제에 한한 가치 이론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와 프레이저의 논의가 재생산에 대한 논의라고 한다면 한 가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가치 이론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 이론은 경제에서도 상품이 가치를 갖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는 이론에 불과하다. 이것이 가사노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예컨대 가치 이론에 따라 가사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가사노동의 물질적 재생산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가정 상 사용가치와 가치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을 먼저 정확히 따져보는 배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사노동과 가치

여기서 다른 말을 해보자. 가사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가?라는 질문은 노동가치 이론에서 대답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를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하는데 그 구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규정되고 있다.

  • 노동력 상품이 거래되는 노동력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 그 노동력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노동이 투하된다.
  • 그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 가지고는 적절하게 답변하기 곤란하다. 가사서비스업 노동력 시장은 분명 존재하고 한국표준직업분류(KSCO)에도 분명 잡혀 있으며 통계자료도 있다. 수가 적어서 그렇지. 그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 이것을 이론적으로 답변하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며, 실증적으로는 답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노동력 상품 여부는 관측할 수 있지만 잉여가치는 관측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고용된 모든 노동은 사용가치를 위해 수행될 것이기에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럴 경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주 실수를 하는 것은 물질적 생산의 여부로 생산적 노동을 판가름 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들은 최근 실증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이 개선되어왔다.[footnote]Gouverneur, J., 1983, Contemporary capitalism and Marxist economics, Martin Robertson. [본문으로]

  • 정성진, 2005, 「한국경제의 마르크스 비율 분석: 1970-2003」, 《사회경제평론》 제25호 pp293-339. [본문으로]
  • 정구현, 2016, 「한국 자본주의의 마르크스 비율 추세: 1980 - 2011년 - ‘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 모형이 지니는 약점과 그 보완」, 《사회경제평론》 제50호 pp25-58. [본문으로]
  • 피터 커스터스. "자본은 여성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p212. 새움총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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