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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럴드 앨런 코헨의 "생산력 우위 태제"에 대한 소개를 위해 기획한 시리즈이다. 아마도 2부작으로 끝이 날 것 같다. 이는 나의 올해 2017년의 학습계획 중 하나로 손꼽은 것이고 나에게 이를 정리할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이를 검토한 내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글은 코헨(1981)[각주:1]에 나오는 제 1장 생산력의 구성(p99-147)과 3장 경제구조(p149-183)에 대해 정리 및 노트한 것이다.

코헨의 "생산력 우위 태제"는 생산력이 생산관계에 대해 설명적 우위를 갖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를 일종의 과학기술만능주의(technicism)로 해석하는 것은 이를 오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산관계를 설명한다는 입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이는 "어떤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특정한 생산관계가 그에 대응하여 존재하는 것은 그 생산관계가 특정한 생산력 수준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우선 이를 논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전제가 필수불가결하다.

a) 생산력은 생산관계에 대해 설명적 우위를 갖는다.

b) 생산관계는 경제구조의 일부이며 이 둘은 경제적이다. 하지만 생산력은 그렇지 않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기초는 생산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경제구조란 무엇이고 이를 생산력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산력 우위 태제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이 기초적인 개념적 접근 속에서 그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1. 경제구조와 생산력

인간은 자신들의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면서 자신들에게 필요불가결하면서도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일정한 관계,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에 참여한다. 이들 생산관계의 총합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실질적 토대를 구성하고 그 위에 법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진다.[각주:2]

마르크스에 따르면 경제구조는 생산관계로 구성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코헨에 따르면 그 외의 어떤 것이 포함된다는 언급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따라 코헨은 생산관계만이 경제구조를 구성하는데 기여한다고 정의내린다. 이는 생산력이 경제구조의 일부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 왜 생산력은 경제구조의 일부가 아닌가?

① 힘(power)은 어떤 관계가 아니다. 힘은 대상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대상이 갖는 속성(property)에 해당한다.

② 생산관계는 특정 발전단계에 있는 생산력에 상응한다. 그런데 상응한다(correspond)는 의미가 생산관계의 집합 속에 생산력이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기존 연구자들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③ 생산관계는 경제적이다. 허나 생산력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②에 대한 구체적인 코멘트로서 코헨은 액턴(1951)[각주:3]을 포함한 여러 학자들을 언급한다. 코헨은 그들이 다음 과 같은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산력을 경제구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1) 생산력이 설명에서 중요한 것이라면, 생산력은 경제적 토대의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각주:4]

태제 (1)의 전항을 코헨은 인정한다고 이미 전제했다. 허나 후항의 경우를 부인한다. 따라서 (1) 자체의 서술은 부정된다. 전항을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후항을 인정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코헨이 지적하는 액턴은 잘못된 추론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x는 y이 토대이다"라는 태제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상존한다.

(2) x는 y의 토대이다 : 따라서 x는 y 일부가 근거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3) x는 y의 토대이다 : 따라서 x는 y에 외재하며 y 전체가 근거한다.

코헨은 (2)와 (3)이 옳은 예를 먼저 내세운다. "경제구조는 생산관계[각주:5]의 토대 (2)이다. 왜냐하면 경제구조는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경제구조는 상부구조의 토대 (3)이다. 왜냐하면 경제구조는 상부고조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제 (1)이 오류인 이유는 무엇인가. 생산력은 경제구조의 토대 (3)이다. 경제구조는 생산력에 외재하며 경제구조 전체가 생산력에 근거한다. 생산력은 경제구조의 토대 (2)이다. 생산력은 경제구조의 일부이며 중요한 부분이다. 코헨은 토대 (2)를 부정한다. 그것이 경제의 토대가 될 수는 있더라도 생산력은 경제적 토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코헨은 논의를 미리 생산력이 경제구조에 외재한다고 전제하고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증은 부당해보인다. 허나 생산력과 경제구조에 대한 "토대"에 관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둘 중에 하나는 참이거나 모두 거짓일 수 있겠으나 모두가 거짓인 경우는 거의 언급할 가치는 없어보인다. (아래 박스 참고)

예컨대 x*=생산력, y*=경제구조라고 하면 (4) x는 y의 일부가 아니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또는 (5) x는 y의 일부이면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6) x는 y에 내제하며 y 전체가 근거한다. 마지막으로 (7) x는 y에 외재하며 일부가 근거한다. 로 나누어보자. (5)와 (7)은 적어도 모순적인 명제는 아니다. 그러나 (5)는 x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다른 z를 언급할 책임이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올바른 접근이 아닐 것이다. 또한 (7)의 경우는 x가 일부분이라고 할 뿐 설명적 중요성이 적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w를 언급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논의는 지금 논의를 기준으로 볼 때 그 외의 것을 언급해야 하며 마르크스주의 논리 내부의 외적 대상을 꺼내도록 유도하고 있으므로 이 논의는 거의 무가치하다.

2.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개념적 구분

이를 논의함에 있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이원적으로 접근한다. 이러한 전제는 부당한 것은 아니다. 이는 논의의 전개에서의 편리성을 위함이고 이 둘 간의 비교를 통해 해당 전제는 명료함이 더해질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생산력이란 다음과 같이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하되 추상적 수준의 카테고리로써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6].

[그림 1] 생산력의 구조

C는 A를 가지고 B를 대상으로 생산활동을 한다. (여기서 노동력과 노동력의 가치를 혼동하면 안 된다.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교환을 거쳐 평가된 소비재의 가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경제적 관계에 해당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영역과 교환의 영역을 구분했기 때문에 이런 구분은 지금 논의에서도 중대한 전제이다)  물론 A 스스로가 자동화에 의해 생산활동을 할 수도 있다. 또는 폰 노이만 기계와 같이 스스로를 프로그래밍하여 생산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좀 더 비교적 최근에 가능한 케이스를 꺼내자면 스스로의 판단 하에 택시를 운전하는 인공지능 머신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이럴 경우 생산력 개념을 변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산도구에 해당하기 때문이고 생산도구라는 것이 반드시 노동수단으로서만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는 생산력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는 생산력 개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구조의 특정한 사회구성체를 변동시킬 가능성은 있다. (노동력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경제구조 내의 사회구성체를 급격하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생산력의 개념을 경제구조와 경제성을 따로 분리하여 사고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이 엄격한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2-1. 정부

거시경제이론은 통화정책을 통해 경제성장을 부양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케인스의 피라미드 예시처럼 정부는 재정정책을 통해 수요를 부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생산을 독려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정부는 생산력으로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코헨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Φ를 만드는 것은 Φ를 만들기 위한 어떤 것이다. 정부가 생산을 독려한다 할지라도 생산하는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지 생산수단에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액턴과 베너블(1951)[각주:7]은 x가 생산과정을 촉진하거나 독려시킬 때 x는 생산력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베너블의 말이 맞다면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역시 생산력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도둑이나 강도가 자물쇠 시장과 시설보안 시장을 확충하게 하므로 도둑과 강도가 생산력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제약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모든 것은 생산력이다'라고 설명하게 될 우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만큼 설명력 역시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생산력과 그것의 독려를 엄격하게 구분짓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서 정부는 생산력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2-2. 군대

봉건영주 시대의 유럽을 상정해보자. 전쟁이 자주 일어나던 시대에 군대는 농민을 보호함으로서 곡물생산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군대는 생산력인가? 이는 정부에서 다루었던 문제들과 동일한 구조로서 반박할 수 있다. 이미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있다.

생산의 물질적 조건. 즉 농업조건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은 채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철수할 수 있다.[각주:8]

2-3. 음식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노동력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음식이 생산력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짐수레를 끄는 말에게 건초를 줄 때 그 건초는 생산수단으로 분류한다[각주:9]. 이는 생산설비에 구리스 칠을 할 때의 구리스, 전기와 기름을 공급할 때의 에너지들을 모두 생산수단으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예에게 음식을 제공할 때의 음식은 기계에 주는 에너지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생산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노동력이 일하는 중간에 음식을 먹을 때 이를 생산력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이 생산을 독려하는 음악과 같이 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그러나 코헨은 이것이 노예에 관한 예와 모순된다고 주장한다[각주:10]. 예컨대 대부분의 공장들은 구내식당을 운영한다. 거기서 조식, 점심, 석식을 각 교대 근무자들에게 제공한다. 그때 그 음식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에너지공급원. 즉 생산수단이 된다. 이는 생산의 원활한 독려, 즐거움을 주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제공되는 것이고 노동력이 노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목적에서 사용됨으로 생산력에 포함된다. 이런 예에서 볼 때 일명 마찌꼬바(소규모 공장단지)에서 틀어재끼는 즐거운 음악들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노동을 독려해주고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것이 생산을 독려했다 할지라도 이 결론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즉 음식의 예가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 제공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그것이 강제적인가 아닌가는 이 논의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저녁회식을 위해 모든 일이 끝나고 삼겹살을 구워먹었다면 그것은 생산력이 아니다. 그것은 그날의 생산에 대한 에너지원으로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적어도 10년 전에는 IT기업의 직장인이라면 회식을 한 후 다시 일을 하러 가는 경우는 매우 흔했었다. 이때 그것은 생산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즐거움과 독려를 수반하긴 하지만 철야 노동을 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서의 기능 역시 수반되기 때문이다.

2-4. 소결

이와 같이 보건데, 마르크스는 생산의 (간접적) 필요조건과 자극수단은 생산력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경제학도에게 매우 불필요한 구분으로 보이겠으나 이는 생산력 자체가 경제와 외재한다는 점에는 일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것을 경제구조에서 사용될 때 뿐이다. 생산력 우위 태제는 역사 전반적인 어떤 역사이론의 관점에서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3. 경제구조

3-1. 소유권의 행사와 지위

경제구조는 어떤 사회가 갖는 생산관계들의 총화라 볼 수 있다. 생산관계는 개인과 생산력에 대한 유력한 권력관계이지 법적 소유관계는 아니다[각주:11]. 권력은 일종의 소유권이다. 소유권은 어떤 대상을 사용할 수 있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리고 이것의 사용으로 얻은 소득 역시 향유할 권리를 갖게 된다. 이는 또한 경합성과 배제성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각종 권리를 갖는 것이 바로 x는 y를 소유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대입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주인은 노예를 소유한다. 주인은 노예가 생산한 것을 향유할 권리를 갖는다. 주인이 노예를 소유하였다는 것은 노예가 자신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다른 주인에게 판매할 권리가 노예에게 주어져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영주는 농노의 일부 시간을 소유한다. 농노는 그러면서도 일부 시간은 자신의 밭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자신의 농작지와 생산도구, 비료 등의 원료들을 소유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를 소유했다고 설명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영주는 농노를 토지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관할지역에서 추방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는 이 자본가와 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소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는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력 생산수단
노예 무소유 무소유
농노 일부소유 일부소유
프롤레타리아 소유 무소유
독립생산자 전부소유 전부소유

[표 1] 사회구성체별 소유권의 표[각주:12]

여기서 물론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고 안했을 수도 있을 모든 사회구성체의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코헨은 이를 조사하고 있다[각주:13]. 이는 3 가지 방식의 소유(무소유, 일부소유, 전부소유)가 2 개의 자리(노동력, 생산수단)에 들어갈 중복된 경우까지 포함한 순열을 모두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총 $3^{2}=9$ 개이므로 이를 모두 조사하면 [표 2]와 같이 된다.

  노동력 생산수단
노예 무소유 무소유
농노 일부소유 일부소유
프롤레타리아 소유 무소유
독립생산자 전부소유 전부소유
(5) 무소유 전부소유
(6) 일부소유 전부소유
(7) 무소유 일부소유
(8) 일부소유 무소유
(9) 전부소유 일부소유

[표 2] 전체 조사된 소유권의 표[각주:14]

(5)의 경우 : 여기서는 자신이 노동력은 소유하지 않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코헨은 이를 모순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동력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의 노동은 자신의 생산수단을 위해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6)의 경우 : 이는 실재한 사례에 부합할 것이다. 자신이 노동력을 일부 소유하였으면서 생산수단을 전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소작농의 사례에 적합하다. 조선시대 소작농은 자신의 땅을 모두 소유하였다. 물론 조선은 명시적으로 국전제(國田制)였고 왕토사상에 기반하여 모든 하늘 아래 땅을 왕의 토지로 보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양반이든 소작농이든 자신이 점유한 땅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사적 소유지로 보기는 어려웠으나 이는 휴한농법을 극복한 연작농법(連作農法)이 정착됨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함으로서 사실상의 토지소유가 크게 진전되었다고 한다.[각주:15]

(7)의 경우 : 역시 실재한 사례에 부합한다. 자신은 노동력을 무소유했으면서도 생산수단을 일부 소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노비의 경우 일부 자신의 농작지를 가지는 경우에 부합할 것이다. 이것을 적어도 어떤 특정한 사회구성체로 인정할 정도로 생각하려면 적어도 사적 토지소유와 토지 시장이 발달한 조선 후기 정도에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그것을 사회구성체 수준으로 볼 수 있을지는 회의적으로 보이긴 하다. 즉 이는 장기적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만한 사회구성체로 보이지 않는다.

(8)의 경우 : 이 역시 노비의 경우에 부합할 것이다. 허나 그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시간에 대해 생산수단은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나는 사회구성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9)의 경우 : 코헨은 이를 장인이나 소작농을 예로 들고 있다. 나의 경우 이를 현대의 노동자들의 일부가 스톡옵션을 받는 사례도 부합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은 현대에서도 매우 제한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의 노동력은 2013년을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87%는 300인 미만인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며 이들 중 코스닥 이상의 주식시장에 등록된 비율은 크지 않을 것이고 대체로 스톡옵션은 거의 무용지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외의 경우들)은 보통 특정한 사회구성체 내에서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주체들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예속성"이라는 또 다른 변수를 고려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노동력을 소유하나 자신이 사용하는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아닌 경우가 있다. 예컨대 유명한 방송작가는 방송사에 고용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산수단은 소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생산수단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펌에 고용된 변호사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으나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그에게는 생산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즉 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이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소유권의 틀이 그에게 예속되어있고 갇혀있는가를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3-2. 예속성

예속자에게는 그 상위권자가 있으며, 노예, 농노, 프롤레타리아의 경우 주인, 영주, 자본가가 그들이다. 이 상위권자들은 <표 1>에서 생산자들이 적절한 지위의 '모두에' 또는 '일부에'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권리를 행사한다.[각주:16]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어떠한 상위권자도 그 노동력을 소유할 수 없다. 단지 프롤레타리아는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력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자본가에게 유리한 교섭지위를 갖게 한다. 물론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그 예속성을 악화시키고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까지 장악할 수도 있다. (그렇게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노동자 자주기업이 그러한 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섭력 우위가 사회주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또한 라이트(2009)[각주:17]가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적극 반영하고자 한 막스 베버의 "기회독점주의"에 관한 개념과 유사하다. 그는 이를 중간계급의 분석에 이용하였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사회구성체의 높은 추상수준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은 많은 유용성이 있다고 본다.

3-3. 소결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IT의 프로그래머나 디자이너의 경우 그들은 노동력을 소유하였으면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으나 생산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트북은 분명 생산수단에 포함되나 그것이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없을만큼 고가의 제품이라고 볼 수 없을만큼 저렴하기 때문에 그들은 "생산수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으므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생산수단이 어떤 실물로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코헨이 명시적으로 '무형자산'에 대해 검토한 것은 아니지만 무형자산으로 볼 수 잇는 과학, 지식, 창의력도 일종의 생산력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각주:18]. 그렇다면 이에 입각하여 이러한 지식이 실체화된 코드집합 역시 생산수단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특정 ERP솔루션에 대한 무형자산은 결국 수많은 설계와 코딩, 테스트를 통해 축적된 지식이라 볼 수 있고 이러한 집약된 무형자산을 함부로 다른 곳에 백업하여 사용하는 행위는 법적으로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예속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개인으로서의 프로그래머는 이러한 무형자산을 소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권력관계를 법적 소유관계와 뒤섞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문제는 조금 까다로워 보인다. 무형자산으로 포함되는 코드집합, 노동자의 머리 속에 있는 업무경험, 그리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기획력이라는 것 역시 코헨이 말한 지식과 창의력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법에서는 이러한 무형자산이 고용된 노동자에게서 나오게 되면 고용하는 기업이 그 무형자산을 소유하도록 되어 있다. 즉 애초부터 법은 기업이 무형자산을 소유하도록 짜여있는 것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권력관계라는 실체가 잠재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자의적 기준에서 법으로 소유권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단정적으로 부인할 뿐이지만 제대로 된 논거는 현재로서는 제시하기 어려워보인다.

4. 결론

지금까지 경제구조와 생산력에 대해 적절히 이들을 비교하며 그것이 관계 맺는 것에 대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알아보았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게 됨으로서 코헨의 "생산력 우위 태제"에 대한 내용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을 약속하겠다.

[이관 글. 2017-07-20 작성]

  1. Cohen. G. A. "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ce." Oxford: Clarendon Press, 1981. (국역판)"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역사유물론 옹호." 박형신, 정헌주 옮김. 한길사. 2011. [본문으로]
  2. Marx, K.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20. Marx Today. Palgrave Macmillan US, 1971. 91-94. [본문으로]
  3. Acton, H. B. "The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Vol. 52. Aristotelian Society, Wiley, 1951. [본문으로]
  4. Cohen. G. A. 1981. op. cit. (국역판)p101. [본문으로]
  5. 여기서 국역본(p102)은 '사회구성체'라고 하는데 코헨은 뒤에 사회구성체보다 경제구조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경제구조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6. Cohen, G. A. 1981. ibid. (국역판)p105. [본문으로]
  7. Venable, Vernon. "Human nature: the Marxian view." (1945). [본문으로]
  8. Marx, K, Bonner. G. A and Burns. E. 1862. "Theories of surplus value." p289. Moscow. 1972, [본문으로]
  9. Marx, K. 186?. "Results of the immediate process of production." published as an appendix to Capital 1 (1976). [본문으로]
  10. [footnote]Cohen, G. A. 1981. op. cit. (국역판)p136. [본문으로]
  11. [footnote]Cohen, G. A. 1981. ibid. (국역판)p149. [본문으로]
  12. Cohen, G. A. 1981. ibid. (국역판)p152. [본문으로]
  13. Cohen, G. A. 1981. ibid. (국역판)p153. [본문으로]
  14. Cohen, G. A. 1981. ibid. (국역판)p153. [본문으로]
  15. 장시원, 이영훈. 2008. "한국경제사." p7-8.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본문으로]
  16. Cohen, G. A. 1981. op. cit. (국역판)p157. [본문으로]
  17. Wright, E. O. "Understanding class: Towards an integrated analytical approach." New left review 60.November–December (2009): 101-16.(국역판)"계급 이해하기." 문혜림, 곽태진 옮김. 산지니. 2017. [본문으로]
  18. Cohen, G. A. 1981. op. cit. (국역판)p124-1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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