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이 글은 제럴드 앨런 코헨의 "생산력 우위 태제(이하 <태제>)"에 대한 소개를 위해 기획한 시리즈이다. 코헨의 논의들을 요약하기는 매우 버거운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그의 논의들을 여러 시리즈로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2부에 종료되는 건 아니고 좀 더 논의할 게 많을 것 같다. 어쨌든 이는 나의 올해 2017년의 학습계획 중 하나로 손꼽은 것이고 나에게 이를 정리할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태제>를 검토한 내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글은 코헨(1981)[각주:1]에 나오는 제 6장 생산력의 우위(p253-308)과 제 7장 생산력과 자본주의(p309-367)에 대해 정리 및 노트한 것이다.

1. 서론

1부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태제>는 생산력이 경제구조에 대해 상대적으로 설명적 우위에 있다는 태제이다. 이는 생산력이 근원적이라고 하는 말과 구분된다. (여기서 근원적이라는 영어단어가 무엇인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코헨은 근원에 대해 적절한 코멘트를 했다고 생각되지 않지만[각주:2] 이를 검토해보는 것은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다.

1부에서 보인 바와 같이 우리는 생산력은 경제구조의 토대이면서 경제구조에 외재하며 경제구조가 생산력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x는 y의 근원이다"라고 하는 것은 "y는 x의 현상이다" 혹은 "x가 나타날 때 y가 나타난다"는 의미와 동일할 것이고 이는 <태제>에 부합한다. 그러나 <태제>는 "x는 y의 일부이다"라는 말과 확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 대전제는 생산력은 경제의 토대가 될 수 있지만 경제적 토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구조와 생산력은 이원적으로 정의된다. 서로 다른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에 단순히 정적인 비교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발전"에 대한 둘 간의 어떤 양태를 확인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발전 태제를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2. 생산력의 발전 태제

2-1. 발전 태제란 무엇인가

발전 태제(Development Thesis)라고 할 태제는 <태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의 두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발전 태제[각주:3]

(a) 생산력은 역사 전반에 걸쳐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발전 태제)

(b) 한 사회의 생산관계의 성격은 그 사회의 생산력 발전수준에 의해 설명된다(생산력 우위 태제).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a)는 생산력이 항상 발전한다는 걸 함의하지 않으며, 혹은 생산력이 결코 쇠퇴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함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는 '생산력은 역사 전반에 걸쳐 발전해왔다."라는 서술과는 다르다는 거다.  발전해왔다는 것은 생산력이 결코 쇠퇴하지 않는다는 단정을 낳는다. 그러나 "경향이 있다."는 말에는 쇠퇴의 가능성 역시 염두하고 있다.

그리고 (b)와 같은 생산력 우위 태제는 생산력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a)의 경향과 다르게 일반적으로 생산력은 생산관계를 설명해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생산력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초래하지 못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정의를 달리 내리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은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상응하는 생산관계는 그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며 최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경향이 있다고 정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대한  내용이 물음표가 된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제적이다. 경제학자라면 적당한 시기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여 일종의 지수를 정의한 후 휴한농법에서 연작농법으로의 발전에 의해 지수적 생산성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측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정도나 되어야 생산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예컨대 발전수준에 대해 적어도 통계적 일반성을 갖추려면 국제비교가 필요할 것이고 이는 지수적 정의를 위해 기준년도를 설정해야하는데 이는 서로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까다로운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발전의 수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 나는 이 문제를 일단 미루어둘 것이다.

2-2. 마르크스의 생산력 우위 주장

이 절에서 우리는 코헨의 접근법의 하나인 마르크스가 생산력 우위 태제에 입각했다는 문헌적 분석을 할 것이다. 마르크스(1859)[각주:4]에서 마르크스 자신은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두 태제에 충실하다는 것을 확인해보자. 원문을 직접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 (...) 생산관계는 (...)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한다.
  2. 생산력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것들이 지금까지 작동해온 (...) 현존하는 생산관계와 갈등상태에 들어간다.
  3. 생산력발전의 형태라는 측면에서, 이들 관계는 생산력발전에 족쇄로 전환한다.
  4. 그때 (코헨 주:경제구조의 변화를 초래하는)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5. 어떠한 사회구성체(필자 주:경제구조)도 그 속에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생산력이 모두 다 발전하기 전까지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6. (...) 좀 더 높은 단계의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것의 물질적 존재조건이 종래의 사회 그 자체의 태내에서 성숙되기 이전에는 결코 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코헨은 1의 서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상응한다고 하였을 때 그 발전 단계에 대해 적합하다는 의미로서 사용했다고 하며 이러한 해석을 코헨은 지지한다. 생산관계가 그 생산력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것의 생산성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응한다(entsprechen)"는 말은 상칭한다의 의미로 쓰였다는 점을 코헨은 부인한다. 마르크스는 "상응한다"는 의미를 "~에 의해 설명된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즉 생산력은 생산관계를 설명한다. 그 반대는 부정된다.

왜 생산력은 생산관계에 외재하며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설명하지 않는가.

이것의 대전제는 본 블로그의 포스팅 "1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생산력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며 경제구조에 외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설명한다고 하려면 일관성을 위해 생산력이 생산관계의 일부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1부"에서 이 의미를 부정했다. 생산력은 경제적이지 않다. 단지 경제구조는 그것을 경제적 동기에 의해 이용할 뿐 그것이 경제의 토대는 될지언정 경제적인 토대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장 1 뒤에 이어 나오는 마르크스의 문장은 사회의식의 형태는 경제구조에 상응한다라는 진술이다. 코헨은 이를 특별히 참조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뒤의 문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생산 관계들은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와 상응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이룬다.
사회의 경제적 구조는 법률적, 정치적 상부 구조가 그 위에 서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상응하는 실질적 토대다. 물질적 생활과 이것을 생산하는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의 일반적 특성의 조건을 이룬다.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각주:5]

상응한다는 의미를 "상칭한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은 뒤 이은 문장에 대해 맥락을 달리 적용해야 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한다. 뒤이은 문장이 애초부터 문장 1에서 나온 "사회의 경제적 구조"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데 코헨의 주장에 동의한다. 또한 다른 문장과 달리 문장 1의 경우는 단방향적 논리에 기초한다. 즉 생산력은 생산관계를 설명하며 그 반대는 없으며 다른 텍스트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장 2, 3, 4는 생산성발전의 결과 결국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양립불가능해지고 그로 인한 긴장은 생산관계의 변형을 통해 생산력에 유리하게 해소된다는 것을 함의한다[각주:6]. 그런데 왜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는가?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그 생산관계가 상응하지 못하는 또는 생산관계가 그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말하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그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없거나, 최대로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장 5, 6은 <태제>를 정교화하는 역할을 한다. 문장 5와 2, 3을 함께 고려해보면 생산관계는 그 자신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생산성의 발전을 허용한다[각주:7]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생산관계의 보수성을 암시한다[각주:8]. 즉 생산관계는 그 성질상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 보수적이다. 이는 실제 역사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조선은 시장의 발전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였고 관청의 주관하에 장시(場市)가 열리는 횟수 등을 통제하였다. 일단 민중들의 사회적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 자체에서 관청은 이를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이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 족쇄였다는 예에 부합할 것이다. 결국 18세기 이후 갑오개혁, 그리고 신흥지주의 등장, 개항기의 시작, 근대적 기업의 등장 등으로 이것이 족쇄가 되었었다는 나름의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각주:9] 다른 예로 북한 역시 생산력 발전의 족쇄의 한 예시가 된다. 그들은 조선왕조가 장시 제도를 통해 시장을 엄격히 통제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시장을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역시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대해 보수적인 한 예이다.

현정경의 문득 든 생각BOX : 그런데 이 말은 자본주의의 경우 다르지 않는가?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을 촉구하고 있는 체제이다. 따라서 보수적이라는 관념은 이에 대해 틀리기 때문에 생산관계는 보수적이라는 말은 조건부로만 맞는 말이 아닌가.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3-2. 생산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를 참조할 수 있으나 여기서 논의된 수준 하에서 매우 약하긴 하지만 설명될 수 있겠다. 그것은 일종의 저항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예컨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근거하는 것은 바로 노동 고용의 급격한 감소를 우려한다는 점이고 이는 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가 자본가-노동자라는 계급에 기초한다고 볼 때 그 생산관계가 유지되지 못하고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부, 왕정의 보수성이 아니라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대해 무한정의 발전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고 문장 5는 "만약 그 경제구조 속에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생산력이 다 발전하였다면 그 경제구조는 사라진다"는 명제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생산성이 최대에 달하였어도 다른 생산관계로 대체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문장 5가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이를 코헨은 fossilization(화석화, 보존화, 폐습화)으로 부른다. (분명한 건 아니지만 마르크스는 인도문명을 fossilization의 예로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장 6이 수반하는 의미는 어떤 경제구조에서 가능한 생산성이 최대로 달한 경우라 하더라도 기존보다 생산성이 더 높은 단계에 상응하는 경제구조가 그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대체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어떤 인과성을 나타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문장 1과 같이 단방향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문장 6은 역사적 실패(miscarriage)를 인정한다. 즉 충분히 성숙한 경제구조가 존재한다해도 그것으로 대체되지 않을 여지 역시 인정될 수 있다는 소리이다.

관점을 달리 하여 더 높은 단계에 상응하는 경제구조로 대체되는 경우를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문장 3, 4는 이러한 경우를 지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더 높은 단계에 상응하는 경제구조로 미리 정의한 이상 이때는 문장 6이 허용할 수 있는 퇴행은 금지된다. 즉 전체 문장의 구조는 경제구조의 대체를 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어져있다고 가정하여 문장 6이 허용하는 실패를 금지시킬 필요가 있게 된다.

따라서 문장 1~6의 검토는 발전 태제인 (a)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대체'에 대해 논의하긴 하지만 여전히 "어떤 발전 수준에서 생산관계는 대체되는가"란 질문은 풀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반드시 "양적 정의"와 이를 통한 "실증"에 의해 뒷받침된 근거를 제시하도록 요구하는가? 코헨은 좀 더 다른 접근에 기댄다.

2-3. 발전 태제에 대한 표준적 논거

실제의 역사는 더 높은 단계의 경제구조로의 이행이 되는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전반에 걸쳐 생산력은 발전해 온 경향이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허나 우리가 마르크스의 문건에서 검토하면서 여전히 경제구조가 대체되는 인과성에 대해 답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코헨은 이러한 문제를 검토하고자 발전 태제 (a)가 참인 논거들을 3 가지로 정리한다[각주:10].

(가) 불변하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

(나) 하위의 생산력이 상위의 생산력을 대체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여기서 (가)의 경우 아래와 같이 표준적인 정의로 보완할 수 있다[각주:11].

(c) 인간은 특정한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합리적이다.

  •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합리적 존재이고 그러한 수단을 개발하거나 발견하여 사용한다.

(d) 인간이 역사적으로 처해온 상황은 결핍의 상태이다.

  • 인간은 시간여유적 결핍, 욕구적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e) 인간은 그들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일정 정도의 모종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기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고 방법들을 교육하고 유지하는 관계적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전반으로 생산력은 발전하며 다른 경제구조로 대체될 수 있다. 여기서 대체된다는 것은 바로 조선 후기의 개항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겠다. 개항 이전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어 생산력이 쇠퇴한 경우였고 그 복구에 대단한 비용을 치뤄야했다. 그럼에도 차차 농작법의 발전에 의해 잉여생산물이 증대하게 되고 조선은 이 잉여생산물을 교환하는 장시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무역시장은 개항 이전까지는 국가의 주관 하에 매우 제한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속에서 민중들의 불만이 생기고 상인들의 불만이 생겨난 이유는 조선은 당시에 발전된 생산력의 수준에 상응하는 생산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전수준의 양적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며 그것이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기반해 접근한다면 적어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생산관계는 대체될 수 있으며 좀처럼 하위의 생산력으로 후퇴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3. 생산력 우위 태재

3-1. 생산력 우위 태제의 검토

다음으로 우리는 <태제> (b)를 검토한다. 즉 한 사회의 생산관계의 성격은 그 사회의 생산력 발전수준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당연해보인다.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는 생산방법 내부에서 노예는 그러한 노동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각주:12]. 이에 대한 논거는 코헨이 제시하지 않지만 이는 매우 간단한 문제이다.

이는 노예가 노동력을 소유하지 않은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독특하고 희소한 기술경험을 가진 엔지니어를 생각해보자. 그가 그러한 지식을 축적하는 동기는 그가 노동력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자본가에서 저 자본가로 가더라도 해당 기술경험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그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한 동기로써도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는 노동력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동기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 힉스(1969)[각주:13]는 자본주의가 노예제에 기반해서 진전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은 막스 베버(1961)[각주:14]에서 찾을 수 있다. 베버는 노예제에 기반할 때 주인이 노예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그 교환가치가 실현되지 않을 불확실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코헨은 이를 부정한다. 자세한 사항은 코헨(1981)[각주:15]을 참고하라.

3-2. 생산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

우리는 생산력의 성격이 생산관계의 성격을 기능적으로 설명한다고 주장한다.(강조는 원문, 이 시리즈에서는 "기능적 설명"에 대한 개념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각주:16]

이미 나는 위에서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상응하는 것은 그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을 '보수적'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이렇다. 바로 어떤 생산관계가 쉽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적합하다는 의미는 생산성을 일정 수준 유지하면서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제>는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고 하면서도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는 말과 양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b)는 그것을 허용하는 문장이기 때문인데, "만약 특정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상응하는 생산관계가 존재한다면, 그 생산관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로 풀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생산력이 적합한 생산관계에 의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조건들은 코헨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촉진시키나, 그것은 우리가 제시한 것처럼 생산력우위 태제에 의해 한정된다. 즉 생산관계는 그것이 생산력발전을 촉진시킬 때 유지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유지된다. 둘째. 생산관계는 생산력발전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경로를 결정짓는 데 일조하고, 이것이 생산력의 독자적인 설명력을 제한한다. 왜냐하면 발전경로의 특징이 생산관계의 특징을 설명하고, 이것이 차례로 생산력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생산관계의 특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생산관계가 생산성 발전속도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또한 생산력우위를 제한한다.[각주:17]

이러한 것들이 <태제>를 제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제>가 역사전반으로 볼 때 옳다고 할 수 있다. 인간 대부분은 비합리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 일반이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낼 수 없으며 그리고 일반적으로 역사가 발전한 사실로 유추하건데 인간은 합리적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4.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행

우리가 검토해온 <태제>에 기초하여 우리는 현 체제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4-1. 자본주의의 임무와 이행

우리가 검토한 발전 태제에 따라 자본주의가 현재의 생산관계인 이유는 그것이 현재의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적합하기 때문으로 결론이 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임무란 현재의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일정 수준 유지하면서 최대의 생산성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가능해지자마자 자본주의는 더 이상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또 더 이상 안정적이지도 못하다고 말했다. 왜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자본주의의 자기정당화를 제거하는지는 분명하다.[각주:18]

그런데 이러한 이행기에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황에 의해 이행된다고 믿었다. 이를 통상적으로 "자본주의 붕괴론"이라고 한다. 코헨은 이를 부정한다. 그것이 필수적인 이유가 없으며 또한 이행이란 결국 더 높은 단계로의 이행을 전제하게 되는데 공황에 의한 이행이란 주장은 '퇴행' 또는 '이행의 실패'의 가능성도 함축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문장 6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새로운 경제구조가 그 태내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데 이것까지 몰락하게 될 가능성까지 함축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우리는 자본주의 공황이 이행에 필수적인 요건으로서 설정하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이행은 붕괴가 출현했기 때문인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우리는 자본주의 이행논쟁에 대해 참고할 수 있다. 브레너(1976)[각주:19]을 참고할 것)

4-2. 사회주의의 전제조건

문장 5에 따라 생각하면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가능한 생산력을 최대로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가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가 쉽게 변하지 않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계급투쟁적 요인으로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생산자들의 세계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생산력 수준이 아니라면 이 역시 궁핍한 결실 속에서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야페(2009)[각주:20]에 따르면 쿠바혁명 이후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도높게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산력 수준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리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이는 물론 그들이 무역시장에서 배제된 상황까지 고려해야 할테지만 말이다.(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적 인간형이 자리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심스럽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노동 일반의 생산력을 충분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기"[각주:21] 전에는, 어떤 사회주의혁명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였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알린 이론가이자 레닌의 스승이기도 한 플레하노프가 마르크스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아직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를 거치지도 못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한지 물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영국, 독일과 같은 선진적인 국가에서 사회주의로 이행되었고 여기에서의 사회주의국가로서의 지원이 된다면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도 레닌 역시 1917년 혁명을 하게 되면서 선진적 국가 역시 동시 혁명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희망했었지만 그것은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 어찌되었든 마르크스 자신은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수준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매우 중시했다고 볼만한 것이다.

4-3. 생산력에서 질Quality의 문제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의 자원의 부족 가능성, 환경적 리스크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즉 우리 지구에서는 자원을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제약 역시 상존한다. 이런 한에서 "생산력의 발전"이란 무엇일까. 코헨은 그것을 양적 정의로서 따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생산력이 또한 "질Quality"의 문제 역시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 역시 고려하는 기술의 발전 역시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갖는 지식과 창의력에서 유래하게 됨으로 그것 역시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 수준을 전제할 때 사회주의는 노동일의 단축 역시 약속한다. 따라서 이는 어느 정도의 생산량의 감축을 동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Quality로 보게 된다면 이 역시 생산자들의 여가와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그것 역시 생산력의 고도의 발전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결론

우리는 생산력 우위 태제에 대한 개념의 소개, 그리고 이를 통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행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 문제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 시리즈는 그런 것들을 모두 수용하지는 못하고 코헨의 책을 읽기를 권장한다. 이 글은 결국 현재를 사는 나로서 정치적으로 중대한 토픽을 뽑아내는 것이겠다. 나는 그 중의 하나로 경제구조에 대한 문제에서 특히 이데올로기, 혹은 상부구조에 대한 설명이 검토가 필요해보인다고 보인다. 이는 다음 글 3부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력 우위 태제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마르크스의 문헌에 기초하여 영미 분석철학의 틀로 재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코헨의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깔끔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명제를 구성해준다.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비판적 정치철학이다. 무언가 굳건하고 완성된 체계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허나 그것이 일관성을 담보해주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일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만한 추상수준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합의할 수 있다는 장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관 글. 2017-07-22 작성]

  1. Cohen. G. A. "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ce." Oxford: Clarendon Press, 1981. (국역판)"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역사유물론 옹호." 박형신, 정헌주 옮김. 한길사. 2011. [본문으로]
  2.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53. [본문으로]
  3.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54. [본문으로]
  4. Marx, K. 1859.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Marx Today. Palgrave Macmillan US, 2010. 91-94. [본문으로]
  5. Marx, K. 1859.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Marx Today. Palgrave Macmillan US, 2010. 91-94. [본문으로]
  6. Cohen. G. A. 1981. (국역판)op. cit. p258. [본문으로]
  7.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59. [본문으로]
  8.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302. [본문으로]
  9. 장시원, 이영훈. "한국경제사." p88-130.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본문으로]
  10.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77. [본문으로]
  11.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79. [본문으로]
  12.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87. [본문으로]
  13. Hicks, John Richard. "A theory of economic history." OUP Catalogue (1969). [본문으로]
  14. Weber, Max. General economic history. New York: Collier Books, 1961. [본문으로]
  15. Cohen. G. A. 1981. (국역판)op. cit. p331-333. [본문으로]
  16.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90. [본문으로]
  17.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296-297. [본문으로]
  18. Cohen. G. A. 1981. (국역판)ibid. p349. [본문으로]
  19. Brenner, Robert. "Agrarian class structur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re-industrial Europe." Past & present 70 (1976): 30-75. [본문으로]
  20. Yaffe, Helen. Che Guevara: The economics of revolution. Springer, 2009. [본문으로]
  21. Marx. K, Bonner. G. A, and Burns. E. 1862~3. "Theories of surplus value II." p580. [본문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