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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단편소설

5월의 발렌타인데이

현정경 2021. 5. 2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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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삼켰다. 침이 목젖을 긁으며 넘어가는 소리가 모든 정적을 깨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꽉 쥔 주먹이 떨리고 있다. 기분좋게.

나는 입을 열었다.

"퇴사하겠습니다."

모든 끝은 달콤하다 하였는가.

실로 그랬다.

 

밤이 내리고 거리의 조명등이 어둠을 밝힌 빛 주변에서 날벌레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추기 시작하는 시간. 그 너머에 환하게 주변을 밝혀주는 한 사무실 창가. 그 너머에 한 인물이 모니터 앞에 무언가를 열심히 집중한 듯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바로 강한수 대리이다. 그 옆에 정혜주 사원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내 정적을 깨고 혜주는 입을 열었다.

"강 대리님. 이거 이러다 일정 못맞추는 거 아닐까요?"

"못맞춘다고 생각하지마.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한수는 신입사원 혜주의 불안감이 섞인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물론 무리는 아니다. 라고 한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내가 책임지고 있다는 사명이 있다. 그런 질문에 위안을 한답시고 "그러게. 나도 불안하네."라고 한다면 누가 책임을 다해 업무를 하겠는가.

"쓸데없는 고민하지말고 그럴 시간에 화면 하나라도 더 만들어 내."

하며 한수는 헤주에게 'WH-097'이라고 크게 써져있는 화면설계서 한 장을 그녀의 책상 앞에 던져넣었다. 그것을 낚아채듯 꾸깃하게 집어낸 혜주는 문서를 몇 초정도 쏘아보았지만, 사실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아직 그녀는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대리님. 확실히 끝난다고 단언할만한 근거 있으신거예요?"

"우리 선배들도 다 이런 식으로 부딪혀가며 일을 끝내왔어. 그런 걸 보면 이번 프로젝트도 끝낼 거야. 걱정하지마."

"그건 근거가 아니에요."

역시 순수한 엔지니어답다. 고 한수는 생각했다.
한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선배들의 말은 도무지 이성적으로 납득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문제들을 묻어버리고, 문제를 미루어두고, 정의하여 끝을 내는 것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결국 유지보수를 할 한 두 명의 인력에게 모든 일거리를 미루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S/W 개발에 끝이란 없으니까. 어차피 안정화라는 목적으로도 우리 개발 프로젝트의 '끝'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편한 방식으로 재정의를 내릴 수 있다.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약속하면서 고객을 달래주면 이 일은 어중간하더라도 어떻게든 끝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시작은 당연히 값싼 프로젝트 계약금과 축소된 일정 때문이다. 알고 있다. 너의 탓도, 내 탓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한수는 혜주에게 어떤 극렬한 모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수 역시도 그것이 부당한 현실이라고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 한수가 경멸했던 그 선배들의 위치에 자신이 있음을 발견했다.

한수에게 있어 지금이 그런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혜주 사원!"

"네?!"

일그러진 한수의 얼굴을 본 혜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방법에 불만이라면 당신이 사업을 책임져보든가. 왜 자꾸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나도 죽겠다고!"

길고 단단한 한숨을 내쉬며 한수는 일어나서 베란다로 향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혜주는 그것을 위협으로 느꼈던지 몸을 한 번 움찔거렸다. 한수는 그런 혜주를 보며 흠칫 당황해했다.

"아.. 미안.."

합니다. 라고 하려했다. 하지만 한수는 바로 전까지 혜주에게서 느꼈던 모멸감에 대한 잔념이 남아있던 바, 결국 사과를 끝맺지 못하고 베란다로 곧장 빠르게 걸어갔다.
후우- 뭐하는 짓일까.

이럴 때 피는 담배는 역시 쓰다. 물론 그렇다고 담배가 단맛이 날 일은 없을텐데도, 한수는 담배가 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건너편 2층의 불이 꺼진 사무실 너머를 보일리가 없음에도 한없이 바라보았다.

"대리님."

뒤에서 조용히 부르는 혜주의 목소리에 약간 놀랐으면서도, 한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냥 왜요. 라고 대답했다.

"힘드신 거 잘 압니다."

혜주는 조금 전의 일에 크게 게의치 않는지 그 맥락을 뚝. 끊어내고 아까 했던 이야기의 고리를 붙여냈다.

"... 하지만 이렇게 간다면 모두 대리님이 독박을 쓰실게 분명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게..."

또릉또르릉또라리롱.

이런 무거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전화 벨소리가 한수의 주머니 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네. 강한수입니다."

그리고 무슨 위급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그가 담당하는 업체에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듯 하다. 그 긴급함으로 한수는 하려던 말의 고리를 어디에 붙여야 할지 모르는 혜주의 옆을 지나쳤다.
"아아아.. 왜 안 되는 거지.?"

한수는 한동안 한 시스템 장애와 씨름하고 있었다. 혜주는 그 옆에서 자신의 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수의 사과와 혜주의 할 말은 그 맥락이 끊어져 저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또릉또르릉또라리롱

또 다시 전화가 온다. 이번에는 다른 업체인 것 같았다. 이내 혜주에게 전화기를 맡기려 했으나 이내 다시 한수의 귀로 가져갔다. 혜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혜주는 가방을 매고 일어섰다. 포스트잇에 둥글둥글한 필적을 남기고 '무언가에' 붙여 그녀는 한수에게 인사했다. 한수는 수고했다는 말을 소리내지않고 말했다. 그가 포스트잇에 눈을 두긴 했으나 그 메모가 무슨 내용인지는 의식하지 못할만큼 또 다른 긴급한 상황을 고객에게서 들어야했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한수는 한동안 말없이 아무도 없는 사무실 한켠에서 의자 뒤로 몸을 뉘어 한 팔로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형광등 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없이 한숨만 후- 후- 불다가 그는 혜주 사원이 님긴 메모를 떠올렸다. 그 메모를 보았다.

「저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리님 탓이 아니에요. 회사의 잘못이에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시 보니 포스트잇이 붙여진 무언가란 작은 키세스 초컬릿이었다.

"오늘이 발렌타인데이구나."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없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망하는 건 아니다. 아니. 애초부터 그녀가 있다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거다. 이것은 망할 프로젝트니까.

좀 더 생각해보니 한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화이트데이도 지난 봄의 막바지에 이른 이때에 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한수는 놀랐다. 그만큼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느정도까지 시간이 지났는지 항상 지금은 무엇인지 속세와 멀리 떨어진 듯 이 바닥을 달려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였나. 혜주 사원..."

내 탓이 아니다.

회사가 멋대로 나에게 일거리를 안겨주었고 거기에 프로젝트까지 시켰다. 그런 와중에 프로젝트의 일정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 속에서 목표경로에 이탈하기 일쑤였다.

내 탓이 아니다.

어떻게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외침 속에서 질 나쁜 프로그램을 개발해왔고 그런 속에서 엔지니어로서의 자존감까지 버려야했다. 그런 길은 선배들이 성공해오던 그런 길이다. 나는 그것을 아무 사심없이 따라야했다. 그렇게 해왔고 성공해왔으니까.

내 탓이 아니다.

 

"퇴사하겠습니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맡고 있는 것은 어쩔거냐. 다 끝내야하지 않느냐. 무책임한 거 아니냐.

엿이나 먹어라. 이런 리스크를 왜 노동자인 나 혼자 감당해야하는가. 나는 시킨 일을 했을 뿐이다. 모든 것을 검토할 시간 자체를 나에게 주었는가. 그런 숙고의 시간을 주지도 않고 나에게 내가 결정한 것이라니. 얼마나 어차구니 없는 짓인가.

라고.

나는 말하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나는 뒤돌아 회의실을 나왔다.

따스한 햇살이다. 이것이 빛이구나.

모든 끝은 달콤하다고 했는가.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그 끝을 즐기고 싶다. 이미 떠난 혜주 사원이 준 키세스 초컬릿을 입에 물며 그렇게 나는 떠나갔다.

[이관 글. 2017-03-24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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