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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공산주의 아포칼립스 호텔

현정경 2026. 1. 17. 20:48

아포칼립스 호텔 1~12화(완)  (TVA)

아포칼립스 호텔의 한 장면

엉뚱하고 웃긴 야치요만으로도 이 애니는 성공이다

이 작품은 영장류만 감염되는 바이러스가 지구에 퍼지게 되고 인류는 더이상 지구에서 살 수 없어 달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호텔 [은하루]의 오너는 안드로이드들에게 다시 귀환할 때까지 경영을 부탁하고 떠나게 된다. 그로부터 100년 후...

이야기는 굉장히 간단하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안드로이드이자 오너 대리의 대리인 야치요의 호텔 유지를 방해(?)하는 외계 손님들에게서 호텔을 지키고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호텔을 운영할 뿐이자나?)

오너의 귀환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희망하며 한 때는 멘탈도 터지고 꿈도 희망도 없다며 비틀 거리지만, 그럼에도 다시 희망을 다잡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다보면 사실 주인공 야치요는 "살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특별히 오늘을 살거야라고 결심하지 않지만 어쨌든 오늘 일을 해야 해 하며 무거운 다리를 저억저억 끌며 출근길에 나서며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한 회 한 회 엉뚱한 야치요를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힐링받을 수 있다

그저 야치요를 보는 것만으로 웃음과 희망과 긍정에너지가 뽐뽐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우주에 다녀온 뒤 무한궤도를 하반신에 장착해서 당분간 돌아다녔던 것도 정말 엉뚱하고 웃겼던 헤프닝이었다.

내용은 아포칼립스고 진실은 매우 어두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이 안드로이드를 통해 "오늘도!"하게 될 것 같다.

상품물신주의가 사라진 아포칼립스

2화에서 한가지 재미있던 장면이 있다. 정체불명인 외계인 손님을 받고 즐겁게 서비스를 제공한 뒤 손님이 즐거우셨는지 물으며 계산을 하라고 한 순간, 외계인 손님에게 지구의 돈이 있을 리가 없던 것이다. 이미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서 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야치요는 아이디어를 낸다. 손님을 이미 폐허가 된 은행으로 데려간 후 바닥에 썩어가는 돈을 자신에게 지불하라고 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야치요는 자신의 호텔의 계산이라는 "형식"을 지켜낸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호텔경영의 최대 목표는 "이윤"이겠지만 이곳을 운영하는 안드로이드들에게는 최대 목표가 "은하루 12원칙"이다.

은하 제일의 호텔을 목표로
식사와 예의에 문화가 있다.
손님의 인생에 오늘이라는 책갈피를
미소는 최고의 인테리어
(생략)
-은하루 12원칙 中-

이런 곳에 가치법칙이 작동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인간미 있는 내용을 가치법칙이라는 형식이 압도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가 없는 이 지구에서 내용만이 남아있는 안드로이드에 의해 가치법칙이라는 형식을 내용이 압도하게 된다. 인류가 사라진 은하루 호텔에서 야치요에게 있어 화폐와 상품(서비스)의 유통순환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고 고객이 행복과 만족을 얻고 갔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가장 재미있던 것은 가치법칙이라는 형식이 어찌되었든 유지되어있다는 사실에 있다. 공산주의에서 화폐는 여전히 거래수단으로서 남아있을 것이지만, 단지 형식적인 의미로만 남게 되어 내용이 형식을 압도하는 사회라 볼 수 있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은하루 호텔의 매출금. 11화에서 야치요가 은하루 호텔 서비스를 받기 위해 여기서 아무거나 집어서 결재를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자본의 유통순환(M-C-M')이라는 형식이 남아있더라도 내용이 이를 압도하는 공산주의의 흘륭한 표현방식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우리가 쿠팡에서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알면서 소비자로서 단순히 거래하고 있는 "형식"을 넘어 이들 기업에 항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든 말든 사실 그들과 뭔 상관일까?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그렇게 사회적인 주체로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내용이 형식을 압도하는 경우는 많이 없지만 그것은 여전히 계속 투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좀 더 역사가 발전되고 우리들이 의식적인 형식과 내용의 투쟁이 발전하게 되면 이와 같은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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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박스는 스포일러성 글입니다. 원치 않으면 접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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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2화에서 돌아온 제2세 인류가 온 뒤 밝혀진 것은 더이상 인류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는 지구에 남아있지 않지만 인류는 이제까지의 지구의 환경과 대기에 더이상 적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2백년 흘렀는데 인류가 뭐 그렇게 바뀔 수 있나 싶긴 한데..

생각해보면 야생 여우를 몇 세대 안으로 개와 같은 친화적인 여우로 통제할 수 있었다는 연구사례(발레예프. (1969)[각주:1], 트루트. (1996)[각주:2], 트루트 기고문)를 떠올려보면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다. 행성에서 살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며 세대가 바뀌었고 그 통제된 실험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세대가 선택되어 결국 편향이 일어난 것.

그래도 좀 황당한 전개이고 납득하긴 어려웠지만 매우 흥미로웠던 엔딩이었다. 그럼에도 야치요는 새로운 약속(신인류는 '곧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을 얻었고 거기에 한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야치요가 "언제 온다고?! 말해!"라며 난리를 치다 결국 대답을 듣지 못한 엔딩 장면은, 헤겔이 말했던 바 "자유는 무한"이며 역사는 무한한 목적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끝-

  1. Belyaev, D. K. 1969. Domestication of animals. Science Journal (U.K.) 5:47–52. [본문으로]
  2. Trut, L. N. 1996. Sex ratio in silver foxes: effects of domestication and the star gene. Theoretical and Applied Genetics 92:109–11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