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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마르크스주의는 실패의 역사를 밟아왔다. 누군가는 사뮤엘 베케트의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각주:1]를 인용하곤 한다. 자주 오해되곤 하는 이 말은 사실 성공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실패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망가진 기계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지젝은 사회적 무의식이 그런 체험이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것은 속편한 주장일지도 모른다.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릴 지 그 운명을 누가 알겠는가? 이러한 부정의 정치철학에서 벗어나서 비데&뒤메닐의 서문을 대조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비판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가 결코 스스로 그 자신과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2]

좀 더 심상히 생각해보면 망가진 기계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비판에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자기비판이란건 쇄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생산적으로 흐를 가능성은 없다. 이들이 대안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배경에서 추론된 것이다. 바로 세계는 변화할 것이고 이 변화를 설명해주는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라면 당연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세계는 변화한다. 그리고 네오마르크스주의는 '대안마르크스주의'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무용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현대 세계의 새로움을 해명하기 위한 분석 도구 및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관점으로서 사용되어야만 한다.[각주:3]

세계가 변했다면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을 것이고 새로운 대답이 필요하게 된다.

대안마르크스주의

잘 생각해보면 이들은 네오마르크스주의를 기존의 이론을 방어하는 보완적인 이론을 구비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의 대안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은 새로운 문제에 새로운 이론을 통해 해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새로운 이론이라 함은 "마르크스주의보다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그 근거를 찾을 때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각주:4]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일종의 프로젝트성으로 생각해야하는데, 이들 역시도 어떤 관점을 마르크스주의에 일관되게 포함하는 것이 아닌 다른 관점을 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안마르크스주의자" 같은 개념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는 "책임을 끝까지 지지 않겠다능"같은 식의 말처럼 들려서 멋쩍긴 했다.

조직과 관리

어쨌든 책은 2부부터 흥미로운 주제가 등장한다. 바로 조직이다.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계급론에 기초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비데&뒤메닐은 '조직'이라는 계급내부의 구성개념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우리는 이어지는 두 개의 장에서 20세기 역사에 대한 해석과 관련한 가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시장에 필적하는 조직이라는 이론적으로 전략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통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비교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지는 두 개의 현상, 즉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출현과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각주:5]

여기서 비데&뒤메닐은 조직을 시장과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예컨대 신제도주의 경제학에서 기업조직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거래비용으로 설명한다.[각주:6] 즉 조직 역시 경제학적 동기와 극대화하는 개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비데&뒤메닐의 조직 개념은 기업을 넘어서 좀 더 일반적인 '관리'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게 되자 조직관계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주요 영역을 장악하였다. 거대 기업의 관리 및 생산체계와 결합된 은행체계 내의 자금조달 그리고 거시경제정책이 그것이었다.[각주:7]

즉 비데&뒤메닐의 조직이라는 것은 생산영역의 기업조직 뿐만 아니라 은행제도를 관리하는 조직, 거시경제정책을 관리하는 공무원조직을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하나의 중간계급으로 묶어도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예컨대 이 세 조직이 서로 이해관계가 보통의 경우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조직은 경제제도 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이들의 이해관계는 어느정도는 일치하며 협조하는 관계라고도 볼 수 있겠다싶다.

참고로 뒤메닐&레비(2003)[각주:8]는 이 일반적인 관리라는 용어를 계급적이고 지배체계라는 의미로서 표현하고자 "자본-관리주의(capito-cadrisme)"라고도 부른다. 이후에 비데와 함께 쓴 이 책에서는 조직-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무래도 자본주의 태내에서 계급내부의 새로운 변화들을 특정해보고자하는 의도에서 그런 것 같다.

어쨌든 비데&뒤메닐은 이 세 조직을 하나의 이해관계를 갖는 정태적인 개념으로 보지는 않는다. 일종의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발전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김덕민(2015)[각주:9]에 따르면 이는 뒤메닐의 연구에서 파생된 것인데, 바로 시기적으로 차례대로 등장한 삼중의 혁명으로 (a)기업혁명 (b)관리혁명 (c)금융혁명을 말한다.

현실사회주의국가와 관리자계급

이렇게 된다면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소련을 세 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선 수립 단계로서 노동자 통제에 대한 향수를 제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계에서는 선동에 의해 지탱되는 의지주의가 주를 이루었다. (...) 두 번째 단계는 스탈린이 죽기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상화 과정을 통해 훨씬 더 큰 정치·행정·기술 관리직 집단으로 권력이 더 확장되었다. 이는 경찰력과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었다.[각주:10]

비데&뒤메닐은 소련-중국 사회주의를 관리직계급 사회로 보는 것이 유용하다고 보는 것일까. 하지만 이정도의 주장은 현실사회주의를 관료제로서 바라보는 관점들과 다르진 않아보인다.

김덕민(2015)[각주:11]의 설명에 따르면 시장을 조직으로 대체하려했던 현실사회주의의 선택은 자본가계급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나 관리자그룹이 계급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각주:12]

두 극에 있는 계급사회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념에 따라 그가 말한 것처럼 현대 사회의 축이자 본질적 대립을 구성한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곧바로 두 개의 '극'[인용자:괄호 생략]으로 배치된다고 제시할 것이다. 시장에서는 사적 소유에 결합된 권력이 전개되고, 조직 속에서는 위계화된 권한[인용자:괄호 생략]에 내재적인 특권이 전개된다.[각주:13]

여기서 비데&뒤메닐이 말하는 두 개의 극이란 공동-착종, 공동-내포를 뜻하며 이는 자크 비데의 현대성 이론과 관련이 있다. "비데의 현대성 이론 안에서 공동-착종(co-imbrication)과 공동-내포(co-implication)는 각각 경제적 측면과 법-정치적 측면에서 시장과 조직의 뒤얽힌 관계를 설명하는"[각주:14] 개념이다.

중간계급이 어느정도의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두 관계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를 갖는다. 첫째는 고용권[각주:15], 둘째는 권한과 관련한다.

예컨대 자본가가 경영-관리를 중간계급에게 양도하였다 하더라도 고용-피고용 관계는 여전히 자본가 소유임은 분명하다[각주:16]. 이는 라이트(2009)[각주:17]도 언급하는 것으로, 중간계급이 어느정도의 자본 소유권을 얻으며 높은 임금을 통해 삶의 기회를 얻으나 고용-피고용 관계가 유지된 상황에서 베버의 간접적 강제, 합리화 요인의 하나인 '해고권'을 통해 통제당하는 관계라는 점에서[각주:18] 중간계급은 계급관계 내 모순적 위치[각주:19]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권한이란 관리, 운영하는 능력에 대한 것이다. 자본 소유자는 이러한 권한을 부여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현장의 관리감독에 있어서의 암묵적 지식은 관리감독자를 바꾸는 의사결정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 게다가 리더를 자주 바꾸는 것은 조직력을 와해시킬 수도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사실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아마도 관리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항력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다음의 인용문을 보면 이 생각이 맞을 것은 같다(?)

조직은 두 개의 전선 위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으로 조직의 대립관계는 관리·운영하는 관리직과 실행 주체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설정되는 거리를 통해 행사된다.[각주:20]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다시 비데의 공동-착종, 공동-내포라는 개념을 곱씹어보자면 자본소유자와 관리자 그룹 간에 착종된 관계, 서로 간에 내포된 관계를 사유하려는 것 같다.

계급 개념에 대한 의구심

이들이 '계급'이라고 말하는 개념이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의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중간계급을 또 다른 '계급'으로서, 특히 생산영역을 넘어서 규정하려 할 때의 문제가 남는다. 현실사회주의의 설명을 일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계급개념이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계급을 생산영역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 비데&뒤메닐은 중간계급을 정책그룹-금융그룹-기업관리자그룹으로 시장과 다른 '조직'으로서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전통적인 계급론과 어울리지 않고 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론을 전통 마르크스주의 혹은 네오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고 멍석을 깔았으니 까방권을 얻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물론 이들의 개념은 거시적 차원에서 매력적이다. 시장과 조직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변혁의 형태를 모색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과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사회주의는 착취의 필요조건인 시장을 약화시키고 조직을 강화했다. 이들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의 타협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실패했다.

관리자들은 그 목적과 가치를 전달하는 과정을 독점하거나 은폐하였고,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상황에서 민중을 배제한 자본가-관리자 타협(이것이 신자유주의적 계급형세의 구체적 특징일 것이다)의 틀 내로 진입하였다.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현재적 시점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전후 관리자들의 소득과 권력은 자본가나 민중들과는 달리 위축된 적이 없으며 꾸준히 확대되어왔다. 그리고 사실상, 민중은 신자유주의라는 자본가-관리자 타협의 틀 아래서 자신들을 방어하거나 전진시킬 수 있는 정책적 또는 정치적 수단을 빼앗긴, 사회적으로 봉쇄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 타협의 관리자들은 사회자유주의로 변신하였고, 현실사회주의의 관리자들 또한 자본가 네트워크의 품으로 종속되었다. 다시 말해 민중은 그 수와는 관계없이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상층의 타협을 통한 또 다른 형태로 이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다.[각주:21]

그렇기 때문에 "시장과 조직이 계급관계의 두 극이라면 계급투쟁은 그것들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의 창출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오래된 요구인 '자유로운 연합'이 그 해답이자 상품관계 및 조직적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날 수 있다."[각주:22]

이는 코헨(1981)의 "내용에 의한 형식의 정복"으로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사회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종속시켜 물신주의를 파괴한다.[각주:23]

하지만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비데의 말처럼 시장과 조직은 공동-착종, 공동-내포하며 이것이 민족국가의 심급에 자리잡고 있다.

생태 문제와 젠더 문제

비데&뒤메닐은 두 가지의 모순이 계급모순과 충돌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생태 문제와 젠더 문제이다.

계급투쟁은 자연에 대한 보존, 성적 평등에 대한 일상생활 및 문화를 위시한 삶의 모든 가치를 방어하는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두 번째 모순이 내포하고 있는 긴급성에 대한 의식을 획득하지 못했음을 자인할 필요가 있다.[각주:24]

하지만 앞에서도 내가 주장했듯이 이것을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젠더 문제와 생태 문제는 자본가-노동자 계급에 근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계급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서 공산주의 운동으로서 포함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공산주의는 개인과 사회적 관계가 분리되지 않은 유토피아적 사회이다. 어떤 것도 개인과 상관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젠더 문제와 생태 문제를 개인과 상관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충분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 과정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예컨대 성 불평등 문제는 없다고 말하는 (줄쓰큰)들과 이와 대립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란 어떤 미래에 도달할 사회라고 말하기보다 하나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보는 '운동' 혹은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한 관점에 이르면 코헨[각주:25]도 언급했듯이 더이상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

비데&뒤메닐은 이후부터 민족국가-세계라는 차원으로 도달하고 있다. 이는 시장과 조직의 두 극단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운동은 민족국가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정치로서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로서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각주:26]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은 내게는 버겁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보실 것을 추천한다. 특히 세계-국가라는 부분은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 떠올랐는데 언제 발리바르를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비교하며 읽어보고 싶다.

약간의 아쉬웠던 점은 역사 분석이 꽤 축약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사실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둘에게는 버거운 문제일 수는 있다. 물론 뒤메닐은 신자유주의 분석을 통해 삼중의 혁명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한 뒤메닐&레비(2000)[각주:27]가 있으므로 빈약하다 싶은 분은 이걸 참고하면 될 것 같은데, 아쉬운 것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사회구성체 논쟁은 오랫동안 트로츠키[각주:28]와 클리프[각주:29]가 그리고 후대의 논의들(다음을 참고하라. 김동혁(2017)[각주:30], 최일봉(2016)[각주:31], 정성진(1992)[각주:32])이 치열하게 논쟁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논의들이 건너뛰어진 것은 한편으로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관 글. 2019-02-05 작성]

  1. Beckett, Samuel. Worstward Ho. Aufs Schlimmste zu.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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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26. [본문으로]
  4.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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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83. [본문으로]
  8. Duménil, Gérard and Dominique Lévy. Économie marxiste du capitalisme. La Découverte, 2003. [국역본]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p125. 김덕민 옮김. 그린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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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김덕민. op. cit. (2015) [본문으로]
  12. 김덕민. ibid. p229. [본문으로]
  13.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134. [본문으로]
  14.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134 주석 2에서 인용. [본문으로]
  15. 비데&뒤메닐은 이를 소유권이라고 하지만 맥락상 고용권이 맞을 것 같다 [본문으로]
  16.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1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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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Wright, Erik Olin. [국역본]p241. [본문으로]
  20.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138. [본문으로]
  21. 김덕민. op. cit. p233-234. (2015) [본문으로]
  22.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1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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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Duménil, Gérard, and Jacques Bidet. 2007. [국역본]p225. [본문으로]
  25. 코헨. op. cit. [국역본]p248 [본문으로]
  26. 김덕민. op. cit. p236. (20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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