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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 Elster

엘스터(1985)[각주:1]를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계기는 바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방법론적 개체론의 도입에 대한 흥미 때문에 시작되었다.

분석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엘스터는 분석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염두해야 할 사실은 분석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일관된 프레임을 갖는 학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학파는 코헨(2000)[각주:2]의 연구에 감화받은 학자들이 코헨을 필두로 연구모임을 갖은 것이 시초였다.

존 로머, 에릭 올린 라이트, 욘 엘스터, 쉐보르스키 등이 이 연구모임에 참여했으며 브레너, 파리스, 바르단, 벤, 슈타이너 등이 참여하여 "No Bullshit Marxism Group"이라는 표어를 사용하였고 로우머의 선집 Roemer(1986)[각주:3]를 통해 '분석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명명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각주:4]

방법론적 전체주의와 방법론적 개인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고유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것을 압축적으로 명명하기는 꽤 어렵고 모호한 문제가 남는다. 예컨대 사적 유물론은 어떤 방법론을 채택하는가? 그 자체를 서술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엘스터를 통해 이것이 내게는 좀 더 뚜렷해진 것 같다.

엘스터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방법론적 전체주의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각주:5]  이런 원칙들이 전통적으로 공유되어왔으며 그 배경이 방법론적 개체론을 받아들이는데에 거부감을 가져왔다는 점이 하나의 증거가 된다. 여기서 전체주의란 단어가 상당히 거부감이 드는데, 적당한 단어로 "총체성"이 떠오르긴 하지만 이는 속성을 말하는 것이지 방법론이 견지하는 프레임에 대해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분명한 사실은 전통 마르크스주의는 개인 단위 분석을 거부해왔다는 점이다.

이런 전통적인 태도는 대체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나 때로는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 중 아주 핵심적인 문제가 고정된 소비계수 가정이다. (엘스터는 이 문제를 자주 거론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비가 고정되어 있기를 바랄 만한 강력한 이론적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의 노동가치가 선호에 달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각주:6]

그러나 아무리 최저생계수준의 임금론을 가정해도 그 필수적인 욕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센(1982)은 빈곤을 정의함에 있어 최저생계품 기준의 모호성을 지적했다.[각주:7] 이는 임금을 일정한 임금재 바구니로 생각하는 모델로서 표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분명 평균적이고 빈도가 높은 최저생계 임금재 바구니를 상상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안심하고 유통-분배 영역을 무시하고 생산영역의 분석에 착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제 자체가 틀렸다면 영역의 구분에 미련을 둘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엘스터의 고정된 소비계수 비판에 대한 '약한' 대응을 보일 수는 있다. 뒤메닐&레비(1995)[각주:8]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일종의 턴파이크 정리를 통해 고전파의 장기균형생산가격이 시간이 무한대로 갈 때, 수요-공급의 영향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보인다. 이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마르크스경제이론에서 의미를 갖는 장기생산가격의 개념에 대한 정당성을 보여준다.

다시 우리의 얘기로 돌아와서, 서유석(1995)[각주:9]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방법론이란 역사에서 서로 다른 경제구조들이 존재하며 이 속에서 개인의 의식이 도출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계급죽음 논쟁을 불러들인 SCA모델((Structure-Consciousness-Action Model)의 원흉이기도 하다.[각주:10] 문혜림(2014)은 마르크스주의가 SCA모델이 아니라는 것으로 대응한다. 이 대응은 구조-의식-행위에 대한 관계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유기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문혜림은 SCA의 인과관계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화해할 수 없다고 제시하고 있으나 유기적 관계로 보는 방법론이 왜 더 유용한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이렇듯 일반론적인 측면에서 어떤 방법론이 유용한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길 원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에서 "설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랜 분석마르크스주의의 논의들을 추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코헨과 엘스터의 논의를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기능적 설명과 의도적 설명

사회과학은 오랫동안 기능적 설명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소화는 소화력의 사용이다"는 말이 대표적인 기능적 설명이다.

기능적 설명은 사실상의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각주:11]

하지만 모든 기능적 설명이 사이비 설명은 아니다. 예컨대 코헨(2000)은 기능적 설명을 두 가지의 귀속설명으로 나눈다.[각주:12]

첫째. "$x$의 기능은 $\phi$를 하는 것이다" ($x$에 기능 귀속)

둘째. "$x$의 유용한 효과는 $\phi$를 하는 것이다" ($x$에 유용성 귀속)

햄펠(1965)[각주:13]은 모든 진정한 설명은 왜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주장한다.[각주:14]  그렇다면 위의 설명들은 $x$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는가? 코헨은 자신의 "결과법칙"을 통해 기능적 설명이 "왜에 대한 설명"이 되는 조건을 밝혀냈다. [각주:15]

만약 유형 $E$의 사건이 $T_{1}$에서 발생하여 유형 $F$의 사건을 $T_{2}$에서 야기한다면, 그 경우 유형 $E$의 사건이 $T_{3}$에서 일어나게된다.[각주:16]

엘스터는 코헨의 결과법칙에 대해 "기능적 설명 형태이기는 하지만, (...) 독단성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각주:17]는 점에서 인정한다. 하지만 엘스터는 마르크스가 사용한 기능적 설명은 대체로 "설명"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때로는 목적론적 설명이 사용됐다. [각주:18]

엘스터에게 있어 사이비 설명을 구분하기 위해 설명이 적합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설명항과 피-설명항 사이의 기간, 즉 원인과 결과 간의 기간을 가능한 줄일 필요가 있다."[각주:19]고 언급한다. 엘스터에 따르면 이와 비교되는 사이비 설명이란 인과와 상관을 혼동할 때, 원인과 결과 사이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거나, 공통의 제3변수의 존재에 의해 발생한다. 이러한 오류를 줄이려면 설명항과 피설명항을 줄여야 한다. 따라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그 간극을 좁히는 유용한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의도적 설명이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한 방법이 된다. 기능적 설명과 달리 의도적 설명이란 개인의 행동에 대한 의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 모델이 대표적인 접근방식일 것이다. 마르크스도 사실 어느 정도는 합리적 선택 주체를 가정하기도 했다. 자본 이동과 노동 이동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각주:20]

의도적 설명은 의도된 결과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를 초의도적 인과[각주:21]라고 하며, 대표적인 예로 게임이론, 사르트르의 반-결과성(counterfinality)[각주:22]을 들 수 있겠다. 즉 의도적 설명은 주체가 의도했던 결과가 반드시 실현되는 설명만을 포함하지 않으며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설명 역시 제시될 수 있다. 엘스터는 마르크스가 종종 기능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에 의해 오염되었기도 하지만[각주:23], 이 반-결과성에 대한 연구에는 큰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마르크스는 이 분야에 대한 선구자로 평가된다.[각주:24]

기능적 설명과 의도적 설명에 대해 알아보았으므로 우리는 이것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유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의 구분을 생각해보면 된다. 또한 때로는 거시경제학에서도 정부의 경제적 행동에 대한 민간부문의 합리적 기대를 모델링 할 수도 있다. 이들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유용한 방법론을 도입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역시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유용한 경우가 존재할 것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집합행동이론에서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단행동이론

여기서는 대강의 집합행동론에 대해 알아보는 정도로 그치겠다.

임화연(1995)[각주:25]에 따르면 엘스터의 책 대부분은 마르크스에게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문헌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며, 마르크스주의들이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부정할 이유가 없다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서 이는 매우 쓸모없는 정보이기도 했지만, 그 작업은 분명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또한 방법론적 전체주의와 개인주의에서 무엇이 우위인가에 대한 평가는 불필요한 것이다. 각각의 연구주제에 따라 어떤 방법론이 유용한지에 대해 평가를 각각 내려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유용한 연구주제는 집단행동이론에 대해서이다. 예컨대 피-억압자의 혁명적 행동이 수행되는 집단행동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① 집합적 행동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집합적 행동의 문제는 바로 무임승차를 해결하는 것이다. 엘스터는 계급의식을 무임승차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각주:26] 집합적 행위 연구에서는 보통 집단이 클수록 무임승차자의 이익은 그에 비례하여 커진다고 한다. [각주:27] 고립성은 대개 집합행동을 방해하는데, 여기서 고립성이란 교통성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 예컨대 5.18 광주항쟁이 일어날 때, 주변의 도시들은 그 정보를 전혀 몰랐다. 전두환 군부가 광주 지역을 즉시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이 집단을 고립시켜서 전국적인 집단행동을 미연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농촌과 공장을 비교해보면, 농촌에 비해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은 서로 근접해있기 때문에 집단행동에 더 유리하다.[각주:28]

이러한 고립성은 교통의 원활함을 통해 상쇄되기도 하지만,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교통의 발달은 국지적인 노동자 경쟁에서 전국적인 노동자 경쟁을 야기한다. 또한 마치코바나 제조직군 노동자는 외국인까지 경쟁상대로 생각해야 한다.

경쟁은 개인들을 고립시킨다.[각주:29]

이렇듯 집단행동을 설명하려 할 때 어느 하나의 모델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집합적 행동이론에서 설명적 다원주의는 불가피하다. [각주:30]

 ②  계급의식

다른 한편 집단행동을 설명함에 있어 마르크스는 자주 목적론적 설명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계급형성에 대해 설명할 때 그렇다. <임금> 원고에서 마르크스[각주:31]는 노동계급이 단결할 필요성과 경제적 이익을 투쟁은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러므로서 미래의 계급투쟁을 준비하게 한다. 이는 즉 노동계급의 경제적 투쟁은 혁명적 계급이 결과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식의 설명이다. 목적론적 설명을 특히 혐오하는 엘스터는 이런 식의 설명이 헛소리라고 일갈한다. 게다가 "경제적 투쟁의 한계 그 자체는 노동자계급이 그 한계를 넘어서도록 한다"는 식으로 경제적 투쟁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질 낮은 모호함"이라고 비판한다.[각주:32] 사실 마르크스&앵겔스는 그 당시로서 정세가 계속 변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니 뭐든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해진 현대에서까지 이를 답습한다면 매우 곤란할 것이다.

 ③ 계급투쟁 혹은 계급연합

다음으로 자본주의 최후에 노동자와 자본가 두 계급의 투쟁일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에 대해서이다. 엘스터는 왜 노동계급이 하나의 적을 상대해야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적이 두 명이라면, 두 적을 서로 싸우게 하여 자멸하게 하는 것은 어떤가?[각주:33] 실제로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과 다른 계급들의 관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브루주아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체를 동원해야 했으며, 또 그때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의 적, 즉 절대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非)산업 부르주아, 소부르주아들과 싸운다.[각주:34]

엘스터는 이행기에서 자본가계급이 과거의 적(지주, 부르주아)과 싸울지 미래의 적(노동자)과 싸울지 선택하는 상황에 처한다고 보고 있다. 노동자의 경우 멀리있는 적(지주, 부르주아)과 싸울지 가까운 적(자본가)과 싸울지 선택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계급연합형성에 대한 나름의 이론이 필요함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두 적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적을 제거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영국 농업노동자의 운명에 관해 논의하면서 "두 도둑의 사이가 틀어지면 잃어버린 물건이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영국속담을 인용한다.[각주:35]

엘스터에 대한 평가

울프(1990)[각주:36]는 엘스터의 집단행동에 대해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집단행동이란 유용성 계산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식과 목적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집단의식이 개개인의 인격에 내면화된다는.. 어찌보면 SCA모델로 합리적 기대가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다시 논의가 뱅그르르 돌게 된다;; SCA 모델이 유용한 분야는 무엇인가? 계급죽음 논쟁에서 SCA 모델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 모델의 유용성은 바로 거시적 수준에서 유용하다는 나름의 합의가 있었다. 여기서 울프의 말은 (본인이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SCA모델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웰데스(1989)[각주:37]는 엘스터의 게임이론적 접근은 마르크스 이론에서 제공되는 구조적 정의(특정한 사회구성체, 예컨대 영주와 농노, 자본가와 노동자)가 선행되어야만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서유석(1995)[각주:38], 올맨(1976)[각주:39]은 이런 점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구조의 설명에 있어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즉 이윤극대화라는 개념은 이윤이라는 개념이 가능한 생산양식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지적들은 방법론적 전체주의가 개인주의보다 설명적 우위를 갖는다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구조의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도 볼 수 없다. 예컨대 당면한 연구과제가 혁명적 행동을 하게 되는 집단행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고 하자. 사실 이런 접근은 자본주의 이행을 설명하려는 설명에서 의도적 설명을 자주 사용한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도시민은, 농노가 부담하는 과중한 부역에서는 벗어났지만 영주에 대해 여전히 특정의무를 지고 있는 장원의 자유소작인과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차이가 날 뿐이다.[각주:40]

그런데 엘스터라면 이런 식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의도적 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집단을 하나의 의식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당시의 사회구성체가 단순했다면 모르겠지만.. 이행논쟁을 지켜본 독자라면 적어도 유럽 13~17세기 동안의 이행 과도기에서 사회구성체가 단순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봉건귀족과 상인, 지주, 길드, 소작농, 농노 등의 복잡한 사회구성체가 얽히고 섥혀있었다. 이런 식의 의도적 설명이 필요한 경우 적어도 경험적인 분석을 통해 저런 언명의 정당성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이런 설명방식에 대해 보완해줄만한 껀덕지를 제공해주며 적합성의 판단에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결론

여러 지점에서 불필요하게 보이는 문헌적 분석들이 보여서 읽는 것이 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의외로 집단행동이론은 난잡해보인다. 엘스터는 설명적 다원주의를 피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름의 정리를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해서 마르크스의 문헌을 제거하고 보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는 유익했지만 사실 크게 판타지를 가질 필요도 없다. 엘스터가 집중하는 것은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부정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 추가 덧글(페이스뷱에서 페친인 심 씨와 이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이로부터 정리한 결론을 추가하였다. 의견에 너무 감사드린다)

위에서 나는 일반론적으로 방법론의 우위성을 가릴 수 있는가 질문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대체로 각 연구주제마다 이로운 방법이 있고 적합한 방법이 있다. 어떨 때는 혼합해야하는 경우도 생긴다. 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집단행동이론에 유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혼합적인 방식을 채택한다고 한다. 예컨대 네트워크이론처럼 의도를 갖는 노드들의 관계 뿐만 아니라 집단의식으로서 의도를 갖는 망과의 관계를 설정해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설명력은 극대화될 수도 있다. 과거 경제학자들은 자본간 경쟁에 의한 한계이윤을 0으로 보는 개념에 만족했으나 70-80년대부터 독점, 역선택, 지대추구 문제들로 어떤 경젱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헐 수 있었다. 엘스터는 방법론을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로 나누고 전체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지만 실상 이 이분법의 효과는 유용성의 일반적 평가가 불가하다고 봐야겠다. 결국 이것들이 딱딱 구분된다기보다는 혼합하는 편이 유용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아슬한 경계는 여러 이점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방법론을 명확히 구분할 당위는 있다. 때로는 우리는 혼동하기 쉽다는 거다. 위에서 인용한 돕의 사례는 집단을 하나의 의식으로 간주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마르크스의 경우 「브뤼메르 18일」에서 아예 거의 대부분 전체주의 서술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집단을 하나의 의식으로 볼만한 근거가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적어도 방법론의 이분법과 상대적 비교는 (무엇이 일반적으로 우위인가에 대해 말하긴 어려워도) 설명의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생각하는 앨스터의 의미는 그정도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유연하게 방법론을 사용했다고 평가될 수 있겠으나, 혼란스러워 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로 인한 문제를 그 자신은 인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후대의 연구자들이라면 그가 혼란스러웠던 것까지 물려받으면 안될 것이다.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 필요성은 언제나 과하지 않다.

[이관 글. 2018-11-04 작성]

  1. Elster, J. (1985). Making sense of Marx (Vol. 4). Cambridge University Press. (국역본) 마르크스 이해하기 1. 진석용 옮김. 나남 출판사. 2015.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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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Roemer, J. (Ed.). (1986). Analytical marx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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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문혜림. 2014. “계급 죽음 논쟁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 p20. 한국사회경제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1–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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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Hempel, C. G. (1965). Aspects of scientific explanation (pp. 331-496). New York: Free Pres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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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Cohen, G. A. (2000). op. cit. (국역본) p4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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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Elster, J. (1985). (국역본 1권). ibid. p31 [본문으로]
  19. Elster, J. (1985). (국역본 1권). ibid. p22 [본문으로]
  20. 자본가는 다른 자본의 이윤율 수준에 반응하여 이동하며,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임금률 수준에 반응하여 이동한다 [본문으로]
  21. Elster, J. (1985). (국역본 1권). ibid. p49 [본문으로]
  22. 번역서는 반종국성이라고 나오는데;; 잘 안쓰는 단어를 왜 썼는지 이해가 안간다. 반-결과성이라고 쓰는 용례도 논문들에서 찾을 수 있어서 이렇게 표현하겠다. [본문으로]
  23. 이 글에서는 굳이 마르크스의 기능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에 대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두지도 않고 있다 [본문으로]
  24. 서유석. 1995. op. cit. p309-310. [본문으로]
  25. 임화연. 1995. “마르크스주의와 방법론적 개인주의.” pp193. 哲學 44:187–210. [본문으로]
  26. Elster, J. (1985). (국역본 2권). ibid. p1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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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Marx, K., & Engels, F. (1968). The German Ideology(1845). p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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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Elster, J. (1985). (국역본 2권). ibid. p2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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