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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이후1

한 줄 요약
한국 민주주의의 부식화, 진보와 보수의 광장정치 참여의 증가. 이제는 12.3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일러두기
- 4명의 저자가 참여한만큼 인용문 끝부분에 소괄호 () 안에 저자명과 쪽수를 함께 표기했다. (예 : 양승훈 저자 125쪽, (양승훈: 125))
- 글의 소제목은 내가 임의로 정리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부식화 추세
신진욱은 민주주의의 장기적인 추세에 대한 평가와 함께 현재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부식화’로 진단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한창 확대되던 시기에는 개혁은 더디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보다 발전된 단계로 이행해갈 것이라는 낙관과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이 어느 수준에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현상이 발견되었고, (중략)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는 (중략) 은말하게 부분적, 점진적으로 부식되었다.(신진욱: 25)
이에 대한 흥미로운 근거자료로 세계자유보고서에서 보고된 국가별 자유 지수* 추세를 들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신진욱: 26-27)2
이 추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신진욱: 26)
- 1970년대 후반 : 상승세
- 2000년대 : 정체화
- 2010년대 중반 : 감소세
이러한 감소세는 실제 서구 정치지형이 점차 극우정당세력의 부상화로 목격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신진욱: 28).
12.3 비상계엄.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
한국 역시 비상계업 사태로 친위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신진욱: 29).
계엄은 해제되었고,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하지만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잇는 나라’라는 사실 자체의 중대한 함의, 즉 1987년 이후 3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 민주주의가 매우 취약하며 전혀 ‘공고하지 않다’는 사실은 커다란 경종이다.(신진욱: 35)
뒤이은 광장 시민들의 저항, 현직 대통령의 체포, 헌재의 탄핵 재판 등의 과정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고비를 넘었다는 것은 사실이나(36), 이 고비가 일어난 원인을 제대로 점검해야 할 것이다.
매우진보와 매우보수의 집회 참여율 추이
그런데 “광장”은 단순히 진보적 주체만을 상정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신진욱에 의해 제출된다. 전누리&신진욱(2024)3에서 지난 10년 간 이념 성향별 정치집회 참여자를 조사했는데
- 2019년에 “매우 진보”와 “매우 보수” 응답자의 집회 참여 비율이 비슷해짐
- 윤석열 대통령 당선 2022년에는 “매우 보수”의 집회 참여율이 가장 높았다.
물론 “매우 보수”와 “극우”는 다르지만(46) 일종의 대용 지표로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하여 신진욱은 윤석열 탄핵집회의 현상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기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준비된’ 결과라는 의견을 제출한다(신진욱: 45).
파시즘의 공통점
파시즘의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는 공통점으로 위로부터의 국가폭력과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이 상호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하는게 흥미로웠다.
그런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많은 연구가 파시즘으로 간주해온 대상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군사독재, 일인독재, 일당독재 등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강압’이 지배적인 비민주적 정치체제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자발성’이 위로부터의 국가폭력과 상호작용하면서 결합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신진욱: 64)
2030 남성의 극우화는 과장되었을지 모른다
이번에 자주 희자되었던 2030 남성의 극우화라는 의제에 대해 양승훈은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을 던진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20~35%가 극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추가로 보자. 먼저 2022년 3월 9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에서 지상파 3사 성별 연령별 출구조사를 살펴보면, 당시 20대 남성의 36.3%가 이재명 후보를, 58.7%가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고, (중략) 윤석열을 지지했던 2030 남성 중 탄핵을 반대하는 숫자는 애초 지지 인원의 60% 내외다. 보수적인 선택(윤석열 지지)을 했지만, 극우적인 선택(탄핵 반대)으로 확산되는 효과는 없었거나 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양승훈:131)
이런 부분에 있어 좀 더 세심한 검토와 평가가 필요해 보이긴 한다. 다만 이건 지나치게 경험적인 생각이지만.. 지난 20대 개새끼론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정치를 남기지 않은 것처럼, 이번 2030 남성 극우화 표제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청년 불안정 노동에 대하여
현재의 청년의 불안정성에 대한 추세를 검토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2030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해서 광장을 바라보는 이 관점에 대해 사태가 어떻게 흘렀기에 이런 젠더적 분리가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승윤은 불안정지수(이승윤:188)를 활용하여 분석하는데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매우불안정 집단 중 남성의 비율이 최근에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이승윤:193)
- 청년과 비청년 집단 간 불안정 분포가 2005년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2022년에 이르면 큰 차이를 보인다. 청년 내부 구성을 보면 지표에 따라 확인된 중간 불안정성 집단의 비율이 감소하면서 양극화가 일어난다고 한다(이승윤:192-193)
- 자신의 계층위치 대한 인식은 젠더별로 차이가 관찰된다. 안정에서 불안정으로 갈수록 여성은 계층과 불안정성을 완만하게 인식하는 반면 남성은 불안정성으로 갈수록 더 강하고 민감하게 인식한다. 가설이지만 여성은 불안정성을 내면화하고 감내하는 반면, 남성은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의해 계층 인식을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승윤:202)
첫째. 청년 남성층의 불안정성은 최근 들어 급격히 증가한 역동적 현상으로, 청년 여성층은 상대적으로 장기간 구조적 불안정성에 노출되어왔다는 시간적 궤적의 차이가 존재한다. 둘째. 청년세대 내부는 '안정' 집단부터 '매우 불안정' 집단까지 이질적 하위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내부적 계층화는 동시대적으로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청년세대를 단일한 정치 성향이나 성별 이분법으로 환원하는 접근은 방법론적 한계와 인식론적 오류를 내포한다. 청년 불안정노동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략) 다차원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즉 계급, 젠더, 교육, 지역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정체성 형성 과정에 대한 정교한 분석틀이 요구된다.(이승윤:212)
낮선 현장으로 달려가는데 꺼리낌 없던 말벌동지들
이번 광장에서 ‘촛불’ 때와 다른 어떤 독특함은 낮설을 투쟁 현장 곳곳으로 무작정 모여들었던 현상이다. 이를 말벌동지라고 희자되었다.
낮선 존재와의 연대를 통해 승리를 경험한 시민들은 더욱 낮선 현장으로 모여들었고, 여러 현장을 옮겨다니며 연대하는 ‘말벌동지’도 출현했다. 말벌동지들은 2024년 12월 24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하철 투쟁을 비롯해 동덕여대 사학비리 공학전환 반대 투쟁,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농성,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농성, 여객기참사 공항 자원활동 등으로 현장을 옮겨가며 연대를 확장했다. 연대 경험은 새로운 배움의 장으로서 확장된 공동체를 만들었다. 농민들 역시 시민들의 마음에 화답하고자 2025년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부스를 차리기로 했다.
남태령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적극적 돌봄 실천의 장이었다. 남태령 현장에 가지 못했더라도 시민들이 SNS와 실시간 도로 CCTV 등을 확인하며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난방 버스, 푸드트럭, 핫팩, 간식 등을 보내며 물리적 연대를 실천했다.(이재정:103)
나는 특히 이런 연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설문조사 주관식 응답 중 흥미로웠던 일부를 발췌해보고자 한다.
“배가 고파서 가져온 호떡을 먹었는데, 옆자리 아저씨도 하나 드렸어요. 그랬더니 호두를 주셔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ㅇ ㅔ아저씨께서 먼저 가시면서 ‘수고하세요’라고 인사하셔서 모르는 사람과 적절한 호의를 베풀며 가까워진 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사람을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라고 합니다. 그 탓에 불안이 높아지고 신뢰가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광장에 나와 연대한 순간, 세상은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사방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음식과 필수품이 쏟아집니다. (중략) 바닥났던 신뢰가 다시금 생겼기 때문일까요. 몇 번이고 집회에 나오고 싶다는 생각입니다.”(이재정:104)
모르는 사람과의 연대 경험은 물론 근래의 청년세대에게는 생소했을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과거의 기성세대는 이런 경험을 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기성세대들은 그러니까 거리에 CCTV도 금융실명제도 없었고, 가정폭력에 무딘 사회 분위기, 아동 납치가 휑행했던 말그대로 타인은 지옥이었던 시절을 지나온 세대들이다. 이런 이들은 아무래도 근래의 청년들보다 오히려 더 사람을 안믿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에 비해 근래의 청년들은 범죄의 관리감독, 범죄예방 시스템이 발전되고 금융시스템의 관리역량 등이 상당히 발전된 시대에서 자라왔을 것이다. 적어도 타인을 믿지 않는 심리의 일부는 “시스템”이 일부 분산되어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것은 세대별로 다른 맥락으로 닥친다는 생각이다. 광장에서의 모르는 사람과의 연대 경험은 기성세대에게는 “’그래도’ 믿을 수 있다”라면 젊은 세대에게는 “이것이 믿는 것이구나”인 것이다.
“저는 주로 은둔하며 살아서 사람들과 말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바깥에 나가도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고, 저도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그러나 집회에, 광장에 나간 뒤부터 사람들과 말하는 것, 먼저 말을 거는 것이 기꺼워졌습니다.(후략)”(이재정:107)
이런 맥락이 말벌동지라는 독특한 운동형태를 만든 원인이 아닐까 한다.
12.3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중요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한국사회가 이 모든 문제를 풀어갈 인적, 문화적, 제도적 자원을 충분히 가졌느냐다. ‘친위쿠데타’와 ‘극우 파시즘’이라는 12.3 국면의 특성은 한국사회에 큰 난제를 부여했다. 문제는 민주주의, 인권, 평등, 평화, 다양성의 가치를 위협하는 세력이 소수에 국한하지 않고 정부와 사회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단순히 극우세력을 사회에서 도려내는 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12.3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모든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을 배태하고 허용한 과거 한국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12.3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신진욱:70)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도래한 극우세력을 사회에서 도려낼 수 없다. 결국 이젠 12.3 너머를 어떻게 이들을 어쩌면 덜 위험할지도 모를 방식으로 통합해낼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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