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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세진. 「금붕어의 철학」1

한 줄 요약
어항에 갇혀있는 금붕어는 바깥으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은 예속화된 주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현행성을 통해 가능하다.
일러두기
- 생략 시 앞은 (전략), 중간에는 (중략), 마지막 생략은 (후략)으로 표기하겠음.
- 인용문에서 번역어와 외국어를 병기한 경우엔 외국어를 무시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 인용 쪽수는 쪽수만 표기. (예 : 9~10쪽 ⇒ (9-10) )
- 여기 글에 나오는 소제목들은 책의 소제목이 아니라 내가 편의와 정리를 위해 임의로 지은 것이다.
- 인용문에 내가 설명을 달아야 할 경우엔 대괄호 안에 "[@현정경:]"으로 표시하여 구분했다. (예: 그것[@현정경:권력]은)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두 가지 : 주체와 권력의 개념쌍 그리고 현행성
(전략) 조금 더 넓게는 현대 프랑스철학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하나의 핵심 관념으로서 주체와 권력이라는 개념쌍을 설명한다는 독특한 전략을 취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알튀세르, 푸코, 버틀러 각자의 사상에 관한 평이한 해설을 제시하기보다는, 주체와 권력이라는 개념쌍으로 이 세 사상가를 해제하는 방식을 취합니다.(9-10)
저자는 첫 서론부터 포스트-구조주의를 주체와 권력의 개념쌍으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이 세 사상가의 공통점이 아니라 세 사상가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는 견지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와 함께 저자가 서론에서 환기시키는 또 하나의 주제는 바로 현행성이다.
(전략)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은 그래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이라는 점은 기억해 두세요. 발리바르는 알튀세르, 푸코, 버틀러를 ‘현행성의 철학’, 더 정확히는 ‘구조로서 현행성의 철학’이라는 이름표 아래 하나로 묶으면서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의 의의, 쓸모, 결론, 정확히는 그 ‘정치’ 또는 ‘저항’ 관념을 강조하죠.(13)
이렇듯 저자가 서론에서 밝힌 핵심 주제 두 가지를 염두하고 출발해보도록 하자.
이론적 인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알튀세르, 푸코로 대표되는데, 저자는 이것이 선배 세대인 사르트르, 카뮈의 이론적 인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한다.
후배 세대의 숙명은 선배 세대를 비판하는 것이죠. 사르트르 이후 세대, 그러니까 푸코나 알튀세르 등은 이러한 이론적 인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론적 반反인간주의’를 주창하는데, 이를 다르게 말해 ‘구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인간’이 아니라 이 인간을 만드는 ‘구조’를 강조하는 사유가 인간을 중심으로 짜인 사유와 대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24)
구조주의는 이런 점에서 “이론적 반인간주의”(99)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란 구조에 의해 구성되는 것”(99)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유적 인간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99)인 것이 된다.
이후 현대 프랑스철학계 내에서 이러한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들뢰즈,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구조주의이다(25-26). 이들의 비판의 핵심은 “구조의 재생산보다는 이 구조의 해소, 즉 그 한계에 주목”(26)하는 것에 있다.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진리는 없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이들이 서로 상반되는 논리의 탈구축과 해체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일종의 상대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인식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구분을 통해 오해를 풀려고 시도하려 한다.
사람들이 말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불신함으로써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됩니다.(56)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언어구성주의와 사회구성주의를 갖고(44) 있는데 반해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로서 현행성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44)으로 구별하고 있다.
나도 대학 교양과목을 통해서나 들었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에 따라 둘을 별로 구분하지 않고 있었는데, 저자는 이 둘을 구분하려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 걸까? 일단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구조주의가 미국에 도입되면서”(27) 여러 학자들에게 퍼져나가 형성된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딱 무엇이다 “규정하기가 힘든 개념”(27)임을 저자는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저자가 말하는 포스트-구조주의는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분되는지에 대해 좀 더 들어보도록 하자. 저자는 데리다를 꺼내든다.
결국 [@현정경: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진리는 텍스트 체계의 효과로서 생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중략) 태제는 진리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진리의 불가능조건과 함께 그 가능조건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던 거죠.(78)
데리다의 기호론은 기호가 반복가능성을 특징으로 가지며 “기호는 그것이 출현하는 최초의 순간에 이미 미래의 반복을 자신 안에 내포”(76)한다. 그래서 데리다에게 있어 진리는 생산되는 것이 된다.(81-82)
이런 점에서 보면 진리는 기호들이 배열해 텍스트를 생산하고 이로서 생산되며 세계에서 젠더적으로 수행하는 나의 실천이 일종의 “젠더적 글쓰기"(85)가 되어 성적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현행화와 사건의 철학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분되는 지점이며 상대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으로 주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담론주의와 금붕어
뒤이어 저자는 담론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사실 버틀러에게서 권력의 정신적 삶이라는 권력의 내면화 매커니즘은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을 자기식으로 변형한 결과물입니다. 버틀러는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알튀세르의 호명개념을 정확히는 ‘사회적 주체의 담론적 생산’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대표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담론주의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튀세르의 경우 호명이 언어적 부름이라는 점에서, 푸코의 경우 권력 개념이 담론 개념을 매개로 지식 개념과 결합되어 지식-권력 개념으로 또는 담론으로서 지식-권력이라는 개념으로 확립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하는 구조로서 현행성의 철학자인 알튀세르, 푸코, 버틀러 모두는 공통적으로 담론주의자인 것입니다.(122-123)
그러면 담론주의란 무엇일까? “담론적 전회 또는 담론적 돌아섬에 의한 주체의 생산”(123)이다. 그런 점에서 권력은 담론(123)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담론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모델(123)이 있다고 밝히므로 예시가 무척 재미있으니 한 번 따라가보도록 하자.
-어항속 금붕어

한 어항과 금붕어가 있다고 생각하자. 금붕어는 주체, 어항이 담론이다. 여기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핵심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금붕어는 꼭 어항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가?”(126)
-인셉션

저자는 인셉션이라 칭하지만 예시가 인셉션을 통한 것일뿐, 결국 인셉션에서 꿈의 지각과 꿈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형태를 참조한 것일 뿐이므로 핵심은 지각과 창조의 동시성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으로 말하자면 바깥이 없는 자기-지시성의 논리이다. “재귀적 계층 구조 모형에서 재귀성이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갔다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것”(130)이다. 혼란스럽지만 내 사견으로 정리하자면 핵심 질문은 ‘나’는 바깥에 의해 생산된 것인가?에 있다고 본다.
-에셔의 <그리는 손>

어찌보면 위의 인셉션과 유사한 논리기도 하는데, 에셔의 그리는 손이란 손이 서로를 그려주는 형태이다. 이는 재귀적 계층 구조와 달리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없이도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역설을 표현하고 있다. 하여 포스트-구조주의는 “주체의 생산 매커니즘을 바로 이러한 역설로 표현하고 그로부터 저항을 사유”(134)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 모델은 중요해보인다. 역시 핵심 질문은 누가 ‘나’인가?
이런 세 가지 모델을 통해 담론주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질문을 더 잘 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결국 담론주의란 예속적 주체의 생산 그리고 그 주체의 저항의 가능성을 역설을 통해 보여준다고 봐야겠다. 그렇다면 이 예속적 주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알튀세르의 호명
주체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점은 언제인가? 라는 흥미로운 질문이 제기 된다.
최원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호명의 순간이란, (중략)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작용을 ‘나’가 의식하고 ‘나’’의 기원을 상상적으로 무엇인가에 투사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155)
물론 이런 순간은 한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리고 여러 번 반복된다. 버틀러의 젠더라는 주체로 보면 이 호명은 남성 젠더가 남자 화장실을 가고 여성 젠더가 여자 화장실을 갈 때 혹은 남자로 보이는 트랜스젠더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제제할 때 (억압장치) 등에 의해 반복되어 주체가 생산된다(156)
바깥은 있는가
저자가 설명해온 주체란 기원이 없고 허구적이다. 이에 대비하여 바깥을 긍정하는 입장들도 있다.
최원 선생님이 ‘인셉션주의자’라 부르는 이들, 즉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한 슬로베니아 학파와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ㅈ재귀적 계층 구조 모형==역설적 구조 모형=무한퇴행 구조 모형을 어떤 의미에서는 ‘수용’하면서, 즉 무한퇴행의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면서, 일러한 모순, 역설, 아포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프레임의 바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198)
이러한 인셉션주의자들은 주체 이전의 ‘개인’을 가정함으로써 모순, 역설, 아포리아를 해결하려 한다(199).
물론 나는 “주체 이전의 개인”이라는 개념이 주체를 시간적이고 과정적으로 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주체와 개인은 별도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은 현실에서 현실의 인간적 관계(가족, 혈연, 이웃, 친구)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개인이라고 해두는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을 사는 한 남성이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라는 입영통지서가 낭오면서 주체가 되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다.그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가 있었던 때부터 계속 존재해왔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바깥은 없다”고 할 때 구체적인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같은 매우 쓸데없어보이는 질문이 던져지게 되는 것 같아 별로다.
알튀세르의 3가지 철학적 주제
저자는 알튀세르의 궤도가 구조와 정세 사이에서 진동했다는 점에 주목한다(234).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은 그의 다른 논문(배세진. 2025)2를 통해 알튀세르가 구조와 정세 사이에서 동요했다는 설명에서 잘 이해해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한 채로 먼저 알튀세르의 철학적 주제 3가지(239)인 인식, 역사, 이데올로기에 대해 각각 알아보도록 하자.
-인식과정, 또는 인식론적 절단과 토픽(256)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명제를 염두하고 아래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전략) 알튀세르의 인식과정론에서 사고과정과 현실과정, 사고대상과 현실대상은 엄밀히 구별됩니다. 그리고 과학자의 이론적 실천의 목표는 현실추상에서 현실구체로 상승하는 것, 그러니까 현실구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 사고추상에서 사고구체로 상승하는 것, 그러니까 ‘사고-구체’를 생산하는 것이죠. (중략) 알튀세르주의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그러니까 [자본]의 서술방식이 사고추상에서 사고-구체로, 단순한 규정에서 복잡한 규정으로 상승하는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죠.(260)
-역사과정, 또는 구조인과성과 과잉결정성 그리고 과소결정성
알튀세르에게 있어 역사과정이란 “구조인과성”과 관련이 있다(270). 이는 결국 발전, 이행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273). 특히 과잉결정성과 구조인과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저자의 설명이 독특하다.
과잉결정은 역사에서 필연에 대한 우연의 우위를 사유하는 개념이고, 구조인과성은 역사에서 우연에 대한 필연의 우위를 사유하는 개념입니다.(276)
그리고 최종심급에 대한 해설도 흥미로워서 인용해보고자 한다. 나도 혼란스럽던 지점인데 저자의 해설로 도움을 받았다.
(전략) “최종심급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중략) 이는 첫째로, 최종심급이란 존재하고 이 최종심급은 경제이며 최종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한다는 것을, 둘째로, 하지만 이 최종심급에서는 경제 홀로 결정하는 순간이 우리 눈앞에 ‘현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282)
저자의 설명으로 발리바르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했다(283).
-이데올로기
저자는 ‘우발성의 유물론’이 이 이데올로기에 포함된 주제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239). 바로 이데올로기는 “’기원’과 ‘목적’을 파면”(288)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이어지는데,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세계와 상상적으로 맺는 관계 그 자체로 기원과 목적이 파면되어 공백이 발생한다(288)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공백은 서로를 채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개인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걸까. 저자는 호명 태제를 통해 “주체로서의 동일성을 부여하면서도 이를 통해 개인을 주체로 변형”(311)하며 주체를 생산한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실존을 갖는다(314). 즉 국가장치를 통해 개인과의 관계와 어떤 실천들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실존적 증거라 할 수 있겠다.
푸코와 마르크스의 매개자로서의 알튀세르
저자는 푸코와 마르크스의 결합에 있어 중요한 매개자로 알튀세르를 꼽는다(333). 왜 갑자기 푸코가 꺼내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연구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해체, 탈구축, 그리고 재구축”(331)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그러면 푸코는 어느 지점에서 마르크스와 다른가?
정말 쉽게 얘기하면, 어떤 근거로 결합시킬 수 있는가 했을 때 둘 모두 정치의 타자를 사유하는 사상가라는 거죠. (중략) 저항이든 혁명이든 이 정치라는 것이 타자를 갖고 있다면, 마르크스에게 이는 경제적 관계고 푸코에게 이는 권력관계겠죠.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관계냐 권력관계냐, 이 둘은 대립하느냐 아니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느냐, 합쳐질 수 있다고 해도 그 차이점 또는 이단점은 무엇이냐, 이런 질문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발리바르가 푸코와 마르크스를 결합시키고 있어요.(332-333)
둘은 공통적으로 타자에 관심을 두고 있고 이는 각각 경제관계와 권력관계로 접근하는 것이 차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을 염두한 뒤 저자가 알튀세르가 어떻게 매개자가 되는지 설명하는 것도 알아보자.
알튀세르의 작업에서 여러분이 아는 제일 유명한 요소가 이데올로기 개념이죠. (중략)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는 게 푸코의 담론 개념과 ‘거의’ 동일합니다. (중략) 더 나아가서는 푸코의 지식-권력 개념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매우 유사해요. (335)
허나 저자는 이런 단서만 제출하고 자세하게 알튀세르의 매개자로서의 기여가 무엇인지 자세한 설명은 언급되지 않고 있어 아쉬웠다.
사유하는 자에게 명령하는 현행성
개인적으로 발리바르가 말하는 ‘현행성’에 대한 설명이 꽤 좋아서 인용해본다.
저는 현행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로 풀어 환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행성은 전혀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그저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을 말하는 거죠.(422)
발리바르는 철학자, 이론가, 사상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그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422)이 명령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해서 현행성이란 다른 말로 “정세”(423)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결론 : 소견을 포함하여
-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의 구분은 엄밀성이 떨어지고, 저자도 몇번 언급한 소칼의 <지적 사기>(50)로 폿스트모더니즘은 인식이 지금까지도 안좋은데, 그런 점에서 둘의 분리는 마치 문제적인 입장을 재단한다는 인상이 들어 좋지 않아 보인다. 다만, 나는 이 분리를 일반화로 받아들이기보다 일종의 ‘현행성’으로 이해했다.
- 현행성에 대하여 : 나처럼 철학이 전공도 아닌 사람이 포스트-구조주의라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몰두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항상 답을 하기 어려웠는데.. 지식욕인가?라는 굉장히 자만스럽고 소부르주아적인 답은 꺼림직했다. 때문에 발리바르는 그것을 ‘현행성’이 명령하는 것이란 설명하는 걸 보며 꽤 감탄한 적이 있다. 이런 ‘현행성’은 마경에 대한 나의 연구자인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줬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런 ‘현행성’은 일종의 연구자의 수행성에 대한 어떤 원인의 설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을 수행하는 자의 목적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즉 현행성이 그 목적의 정당함의 근거는 아니란 소리. 그러니까 나와 저자 혹은 발리바르의 목적은 아예 다르지 않나.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문제일테고 누군가에게는 불평등 문제일테고 어느 이에게는 노동 문제일테고 어떤 이에게는 환경 문제일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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