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좌파의 길 앞표지

낸시 프레이저는 다음과 같은 태제로서 이 책을 시작한다.

우리를 이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이 사회 시스템을 나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프레이저(2023;서문)[각주:1]

여기서 "식인"이라는 말은 왠지 식상한듯 보이지만 프레이저가 풀어낸 자신의 태제는 다음과 같이 제살을 깎아먹는다, 동종식인이라는 식의 좀 더 그로테스크한 의미로 받아들이는게 좋을 거 같다. 이는 옮긴이의 인용에서도 보여진다.

[인용자 주석 1] 이 책에서 저자는 자본의 그 본성상 자신을 지탱하는 문명적 토대를 포식함으로써 자본 자체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파멸에 몰아넣는 것을 형상화하기 위해 cannibalize/cannibalization을 시용한다. 이 접에서 '제살을 깎아먹다'라는 익숙한 우리말 표현으로 옮기는 것이 어원에도 충실할뿐더러 저자의 의도를 잘 살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번역을 통일했다.

이 책은 사실 이쪽 방면(?)의 이론서들을 탐독한 이들이라면 여러모로 실망스러울 책이다. 명망을 얻은 학자가 은퇴를 앞두고 논문의 형식이 아니라 자기가 쓰고 싶은대로 써내린 정치적인 태제론이라고 할까.

자본주의를 "사회적 제도"라는 정의를 가지고, 이 명분으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려는 점에서 지나치게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본주의와 나름 연결하려 하고 있으나 프레이저 답지 않은 섬세함이 떨어졌다. 일단 이런 식의 논의 하나하나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어 온 주제들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각 주제들을 다룰 여유가 나에게 없다보니 사안들 하나에 대해 대표적인 인용문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체한다.

국가-관리 자본주의 시기 내내 미국의 흑인은 인종 분리, 참정권 박탈, 수많은 다른 제도화된 굴욕을 통해 계속 완전한 시민권이 거부된 탓에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프레이저(2023;2장 수탈 탐식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재생산과 경제적 생산을 분리하여, 전자를 여성과 결부시키고 그 중요성과 가치가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그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의존해 공식 경제를 만들어낸다.
프레이저(2023;3장 돌봄 폭식가)
반자본주의는 모든 역사적 블록에 필수적인 '우리'와 '저들' 사이의 대립선을 긋는 역할을 한다. 이는 탄소거래제가 신용 사기일 뿐임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며, 생태정치의 모든 잠재적인 해방적 흐름이 '녹색자본주의'와 공개적으로 인연을 끊도록 압박한다.
프레이저(2023;4장 꿀꺽 삼켜진 자연)

이와 같이 인종, 여성, 생태, 경제에 대해 개별적으로 살펴본 프레이저는 이들을 어떻게 엮어서 설명하려는걸까? 사실 본게임은 [6장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계선들은 자본주의의 제도적 분리, 즉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착취와 수탈의 분리,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분리에서 발생한다. 이 분리들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위기의 장소가 되고, 투쟁의 판돈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에게는 사회 각 영역들이 내적으로 어떻게 조직돼 있는가라는 물음 못지 않게 이 영역들이 과연 서로 분리되면서 동시에 연결돼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하다.
프레이저(2023;6장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프레이저는 각 사안들의 분할 혹은 분리가 위기를 낳게 되며 따라서 대안 운동이란 결국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모든 제도화된 형태의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를 극복하려 한다면, 생산과 재생산, 사회와 자연,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다시 상상해야만 한다.
프레이저(2023;6장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결국 하고 싶던 말은 이것일 것이다. 하지만 프레이저의 이 책을 통해 얻은 인식 중 중요한 것을 알았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상당히 복잡하다는 사실이고 이 연결된 맥락들을 명쾌하게 압축적으로 설명하는게 무척 어렵다는 사실이다.

-끝-

  1. Fraser, N. (2023). Cannibal capitalism: How our system is devouring democracy, care, and the Planetand what we can do about it. Verso Books. [번역본: 전자책]낸시 프레이저 (지은이),장석준 (옮긴이)서해문집2023-04-10. http://aladin.kr/p/5zWtP [본문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