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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철학 1
한 줄 요약
주체는 실천 이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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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정리
2장. 세계를 변화시키자.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
- 철학에 반하는 혁명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쓰는 것은 현실적 유효성을 지니고자 하는 모든 사유, 다시 말해 지상의 또는 '현세의' 사유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유에게 하나의 불귀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자기 자신으로, 그러니까 철학을 향해 회귀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더 선호한다면, 이는 혹시 우연히라도 다시금 세계를, 그것도 사회 세계를 해석하게 된다면 그 즉시 우리가 철학의 영역 아래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철학과 혁명 사이에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에 따르면 해석이라는 행위를 거부할 경우 결국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침묵하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양자태일은 그 디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만일 '말히는 것이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하는 것은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하는 단어들은 절매로 순수하지 않다. (중략) 세계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반면 혁명적 실천은 (괄호생략) 하나 또는 일의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전혀 순수하지 않다. (중략) 지나가는 김에 마르크스가 이 열한 번째 태제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포기한다는 점을 지적하자. 《공산주의자 선언》에서부터, 그리고 특히 《자븐》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역량을 목도하게되고, 이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또는 어떻게 하나의 변화가 다른 하나의 변화에 기입될 수 있는지, 게다가 어떻게 이 다른 변화의 방향을 바꿔 자신의 흐름에서 이탈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마르크스의 사유 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중략) ‘혁명적 실천’이 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등등)이 지니고 있던 오랜 야심을 이 철학자들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91-92)
이 부분이 흥미로웠던 지점이다. "말하는 것이 실천이며 실천이 곧 말하는 것"이라는 조건 하에 발리바르는 "태제"가 기존에 철학적인 사유로 회귀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변화시키는 방식들을 어떻게 하나의 변화에 기입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태제의 내용은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개입과 "말"이라는 지점이다.
- 주체, 그것은 바로 실천이다
주체는 실천 이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 (p102)
칸트, 피히테, 헤겔 이후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안에서(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프롤레타리아가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인민 중의 인민'이었다는 점을 위에서 확인했다) 진정한 실천적 주체,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떠맡는 주체로 인지한다는 점, (p103)
- <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에 관한 ‘태제들'에서 예고된 ‘프락시스의 존재론’ 이후 《독일 이테울로기》가 ‘생산의 존재론'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 스스로가 우리에게 직접 말하듯, 인간 존재(괄호생략)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생산이기 때문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생산이 비가역적으로 자연을 변형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자기 고유의 존재 수단의 생산, 다시 말해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합적인(즉 관-개체적인) 활동이다. (p116-117)
더 정확히 얘기해보자면 "자연에 변형을 일으키는 행위"로서의 생산은 생산자라는 주체를 생산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는 프롤레타리아를 생산한다. 즉 행위는 주체를 만든다는 지점에 발리바르는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 혁명에 의한 역사의 전환
그러므로 <독일 이데올로기>의 설명은 사회 형태들의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발생/기원을 제시하는데, 이런 사회 형태들의 발생의 핵심 왼리는 분업[노동 분할]의 전개이다. 분업의 모든 새로운 단계는 생산과 교환의 특정한 양식을 특징짓는다. (p118)
3장.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권력과 주체화/복종
- 의식의 자율성과 제한
루소주의적 기원을 갖는 첫 번째 이유는 제도들, 특히 국가(괄호생략) 없는 역사적 분업이란 존재하지 않는디는 점이다. 국가는 자기 자신이 통일적 허구(또는 합의) 그 자체 ― 국가는 이 통일적 허구 또는 합의를 사회에 강제한다 ― 라는 바로 그 이유로 추상의 생산자이다. (p150)
이곳에서 알튀세르의 "국가장치"가 떠올랐다. 하지만 "추상의 생산자"라는 지점은 푸코의 "지식 생산"을 떠올려지기도 했던 부분이어서 재미있어 인용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런 설명에 대체보충적인 위대한 관념 하니를 추가히는테, 그것이 바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 사이의 분할이다. 이런 육체노동과 지식노동 사이의 분할은 잠재적 지배에 불과했던 것울 유효한/현실적 지배로 변형하는 소외된 노동에 대한 소묘 내에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수입된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 사이의 분할이라는 관념은 의식에 대한 이론을 변화시켜 이 이론을 모든 심리학(심지어 그것이 사회심리학이라 할지라도)에서 뿌리뽑아 정치적 인간학에 관한 질문으로 만들어낸다. (p151)
마르크스가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을 말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말했던 "실질적 포섭"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은 곧 형식적 포섭 상태를 유효하고 현실적인 실질적 포섭 상태로 변형하는 것이며 이것을 소외된 노동에 소묘해냈다고 하고 있다.
- 외양의 필연성
현상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는 파르크스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목표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탈신비화 또는 탈신화화와 유사한 운동을 통해서, 위에서 묘사했던 현상을 해체하고 최종적인 수준에서는 '착시 현상' 위에 기초해 있는 외양을 이 현상 내에서 드러내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금 위에서 언급했던 현상들(대상들이 지니는 속성으로서의 교환가치, 상품과 가격의 운동이 지니는 자율성)을 숨겨져 있었거나 혹은 (카메라 옵스큐라에서와 같이) 그 효과가 전도되었던 현실적 원인과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분석은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진정으로 열어젖힌다. (p165)
여기서 발리바르가 언급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중세에 썼던 최초의 카메라라고 보면 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피사체가 뒤집어 보이게 된다. 즉 발리바르는 대상이 전도된 형태로 현시되는 것에 대해 이를 은유로서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상품 물신"을 들 수 있겠다. 상품교환양식은 사람과 삶의 사회적 교환관계인 것인데, 마치 물物과 물物의 관계로 전도되기 때문이다.
주어진 수량적 관계로 제시되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생산 단위들은 이 단위들 각각의 필수적인 노동 정도, 그러니까 각 유형의 유용한 대상에 할애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노동의 몫을 (이 단위들 각각의 생산을 '수요'에 조정함으로써) 사후적인 방식으로만 결정할 수 있다. 이 비율을 결정하는 것은 교환이라는 실천이지만, 각 생산자들 고유의 노동이 다른 모든 생산자들의 노동과 맺는 관계를 각 생산자들의 눈에 '사물들'의 속성으로, 즉 전도된 방식으로 표상하는것은 바로 교환가치이다. 이때부터 개인들의 눈에는, '가치형태'가 노동의 사회적 분할[즉 사회적 분업]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대신에, 그들의 노동이 이 '가치형태'에 의해 '사회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여기에서 내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정식이 등장한다.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 인격들 간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격들 간의 비인격적/물적 관계 또는 비인격적/물적 존재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난다.” (p167)
상품물신은 상품이 사회적 분업의 결과가 아니라 전도된 방시긍로 표상되는 가치형태라는 외양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된다. 여기까지는 상품물신 개념의 이야기라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유일한 ‘주체’는 다수의, 익명의, 그리고 그 정의상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실천하는 주체이다.
(중략)
물신숭배 내에서 대상성의 구성이 어떤 주체, 의식 또는 이성의 선행적 소여(괄호생략)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대상성의 구성은 대상성 자체의 일부인 주체들을 구성한다. (중략)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이 주체들은 ‘경제적 주체들’ 그 자체, 혹은 더욱 정확히 말해 부르주아 시민사회 내에서 무엇보다도 경제적 주체(괄호생략)인 모든 개인들이다. (p175)
전도된 형태 너머에 감추어진 사회적 분업의 더 너머에는 바로 무산자이자 생산자인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그리고 이 경제적 주체는 의식되지 못하면서 생산(실천)하는 주체이다. 발리바르는 이 "대상성"을 "주체"로 뒤집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이 지점은 정신분석의 방법이 떠오르는 바이나 사실 저작자의 의도를 다 이해하진 못했다..
이 세계의 구성이라는 출발점에서 두 가지 철학적 발전들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가능해지며, 이 두 가지 발전들 각각에서 다음의 두 가지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p175-176)
철학적 발전들에 대한 두 가지는 무엇일까?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다.
- ‘사물화’
첫 번째 철학적 발전은 루카치가 (중략)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사이의 거대한 반정립[안티태제]을 제시했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전개된다. (중략) 루카치는 물신숭배에서 하나의 총체적 철학, 즉 인식, 정치, 그리고 동시에 역사에 대한 개념화를 읽어낸다 (p176)
(전략) 프롤레타리아에게서 자신이 대상으로 변형되는 과정은 총체적인 과정인데, 이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변형으로 인해 반드시 전복의 주체, 다시 말해 ‘역사의 주체’(이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루카치가 처음으로 발명해낸 정식화이다)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의 소외를 폐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는 인간 공동체의 철학적 관념을 실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역사를 그 종말/목적으로 인도하거나, 혹은 이 역사를 자유의 역사로서 다시 시작되도록 만든다. (p179)
- 교환과 의무: 마르크스에게서 상징적인 것
루카치의 외삽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고 탁월하지만, 그럼에도 물신숭배에 관한 묘사를 《자본》이라는 그 이론적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한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반면 《자본》은 법/권리와 화폐에 관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상징적 구조들(괄호생략)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로 나아가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두 번째 철학적 발전이다. (p179-180)
우리는 루카치와 그의 계승자들과 같이 역사의 주체에 관한 이론 혹은 [자본주의] 경제(사적 개인들의 세계)에서 미래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이행의 이론이라는 길을 취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르크스에게서 주체화/복종 양식들(경제적-법률적 물신숭배는 이런 주체화/복종 양식들 중 하나이다)에 대한 분석 ― 이런 분석은 역사 내에서 구성되는 상징적 질서와 실천들이 맺는 관계를 다룬다 ― 의 기초들을 발견하게 된다. (p181)
저작자는 루카치의 작업을 존중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거리를 취하는 것으로 느껴졌기도 하다. 주체화를 일종의 예속화로 보는 개념은 푸코에서부터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루카치도 이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는 측면은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했다. 언제 한 번 루카치도 탐구를 해봐야겠다.
4장. 시간과 진보: 또 다시 역사철학인가?
- 부정의 부정
혹은 마르크스에게 진보란 오히려 ‘변증법적으로’ 사회주의를 불가피하게 도래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의 자본주의이고, 이와 정반대로 진보란 ‘변증법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해소하는 한에서의 사회주의인 것이다· · · · · · 아마도 이것이 마르크스의 이름과 항상 함께하는 ’역사유물론의 개념화'가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철학적 불신의 주요한 원인들 중 하나일 것이다. 왜나하면 조르주 캉길렘의 표현을 다시 취하자면, 오늘의 우리는 진보 관념의 퇴폐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p212)
대표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여주었던 5단계 역사발전론(원시공산주의-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공산주의)이 떠오른 대목이며 이러한 비판은 온당하고 다시 회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계급투쟁이라는 심급
여기에서 계급투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훨씬 더 특수한 방식으로 개입한다. 첫 번째로 자본가들의 측면에서, 이들에게 ‘잉여가치 생산의 방법들’ 전체는 ‘필요노동’과 노동자들의 자율화 정도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들이다. 두 번째로 프롤레타리아의 측면에서, 이들은 착취에 저항/반작용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찾도록 강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노동에 대한 ‘과학적’ 조직화의 방법들과 테크놀로지적 혁신들을 통해 자본가들이 노동일 제한에 반격을 가하는 것, 즉 마르크스가 ‘절대적 잉여가치’에서 ‘상대적 잉여가치’로의 이행이라고 부르는 것(《자본》 1권의 3편과 4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축적의 한 요인이 된다. 계급투쟁은 심지어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측면 이외에] 세 번째 측면 즉 계급들 사이의 세력 관계의 쟁점인 국가라는 측면에도 개입하며, 그 모순의 악화는 점점 더 유기적인 성격을 띠는 ‘사회적 조절’을 통해 국가가 노동과정 그 자체 내에 개입하도록 만든다. (p227-228)
- 경제주의의 진실(변증법 Ⅲ)
‘일반적’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유일하게 다수의 자본주의들 사이의 배후와 갈등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자본주의’만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독특한 역사성들만이 존재한다. (p248)
부록 2.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아래는 부록2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현정경: 번역자 주석 부분임) 이 텍스트는 " World of Capital.Conditions, Meanings, Situations"라는 콜로퀴엄의 일환으로 2011년 4월 29일 뉴욕 컬럼비아대학(lnstitute for Comparative Literature and Society)에서 한 강연의 일부분을 프랑스어로 수정/번역한 것이다. (p366)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점이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 간의 분할과 '사용가치'와 '가치'(그가치의 크기는 ‘교환가치’로 포현된다)라는 상품의 두 가지 '요소들' 사이의 평행성과 관련된다는 점울 명확히 하자. 고전정치경제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구분은 인식했지만, 노동의 두 가지 특징들에 대한 구분은 마르크스에게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다.(p370-371)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연구 대상(혹은 그의 ‘발견’ 대상)은 스미스 또는 리카르도의 연구 대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중략) 이런 징후적 독해를 통한 교정이 이루어진다면, 마르크스의 대상은 ‘경제적 사실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p373)
오히려 마르크스의 대상은 하나의 구조, 또는 더 정확히 말해, 하나의 이중적 구조의 질적 변이들과 관계한다. 착취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들 하에서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힘들이 결합된 바로서의 ‘생산양식’과, 경제적인 또는 비경제적인 다양한 실천들을 절합하는(괄호생략) ‘사회구성체’, 이 둘 사이의 중첩을 구성하는 하나의 이중젹 구조 말이다. (p374)
왈튀세르에게서 '노동력'은 이름(그러니까 또한 관점)인데, 이 이름 하에서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로의 개인들의 예속화가 나타나며, 이 예속화는 개인들을 가치화/가치증식, 축적, 재생산 현상들의 ’담지자'로 만든다.(p376)
역시 이 지점에서도 발리바르는 자본주의 분업체계가 주체화-예속화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며 재미있었던 지점이다.
반대로 트론티에게서 '노동력'은 노동자들 자체를 교환 가능하고 상호 변환 가능한 '상품들'로 변환했던,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유 형태들에 대한 갈둥과 전도로 이어지는 그런 과정의 마지막 결과이다. 트론티의 논의에서 핵심은, 이런 '상품'[즉 노동력] ― 단순한 하나의 상품이 아닌 상품(또는 '대상'이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인 상품) ― 의 교환'이 '담지자들'의 고립과 개인화를 전제하지만 생산 내에서 그 상품 즉 노동력]의 활용이 교환을 집산화하며 담지자들 자신을 통일된 계급으로 변형한다는 점이다. (p377)
(전략) 마르크스가 추상노동과 화폐 형태의 지배의 결과로 제시하는, 그리고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의 주체들이 사로잡혀 있는 ‘허상'을 설명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의 전도를 (중략) 대상들 그 자체 사이의 상호작용(괄호생략)에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의 외양으로 확장한다. (중략) 자본주의라는 범위 내에서 화폐적 교환에 의해 생성되는 현실추상의 효과하에서, 외양과 현상은 구별 불가능해지며, 이 둘 모두는 경험의 측면에서 함께 구성적이거나 또는 둘 모두 경험의 객관적 사고 형태이다. (p380-381)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에게 착취에 대한 분석과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 평행한다는 점, 또는 심지어 지배와 착취는 동일한 현실의 두 가지 면모라는 점은 매우 명확하다. (p389)
부록 3.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화폐의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그래서 이 [대문자] 사물(괄호생략)로 육화하자마자, 개인들은 (괄호생략) 그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더 이상 사물들 자체의 속성 또는 사회적 역량의 결과 이외에는 그 무엇도 보지 못하게 된다. (p420)
사실대로 말해,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담론은, ‘노동'을 때로는 내적 결정 또는 가치 ‘실체'로 제시하려 하고 때로는 다른 여러 상품들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괄호생략)으로 제시하려 하는 이 담론의 경향이 보여주듯이, 여기에서 과학적 설명과 외양의 재생산 사이를 진동하거나 [기껏해야] 신비화하는 형태 자체 내에서 탈신비화를 생산할 뿐이다.(p421)
단평
상품물신과 주체화-예속화 설명을 연결짓는 것이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지점이었다. 얼마 후 발리바르는 이런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주제를 떠나, 국민, 민족, 유럽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이정도의 주제 차이라면 발리바르도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끝-
- Balibar, E. (2017). The philosophy of Marx. Verso Books. (국역본)에티엔 발리바르. (2018).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번역. 오월의봄. 2018-05-01 발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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