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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각주:1]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책 표지

한 줄 요약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커먼 뿐이다.

일러두기

  • 원문의 강조표시(고딕체)는 무시했다.
  • 영어를 병기한 경우 영어 병기는 무시했다.

SDGs는 현대의 아편

저자 사이토 고헤이는 서두에서부터 도발전인 메세지를 전한다. 바로 UN이 2015년부터 세계에 제안하고 있는 SDGs(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에 대한 효과를 그 실질적인 환경과 불평등에 대한 해결보다 ‘아편’으로서의 역할에나 효과적이라는 지적으로 포문을 연다.

그렇다면 UN이 강조하고 각국 정부와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SDGs(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는 지구 전체의 환경을 바꿀 수 있을까? (중략) 정부와 기업이 SDGs에 맞춘 몇몇 지침을 따른다고 해서 기후 변화가 멈추지 않는다. SDGs는 알리바이 공작이나 다름없으며 눈앞의 위기를 가려주는 효과 정도밖에 없다.(6)

물론 이는 이 정책의 효과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측면도 있다. 이 정책은 세계적인 연합체 UN에서 제안되는 정책이고 16개의 이행목표를 앞세우고 이를 각국의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고 민간기업, 사회단체 등이 협력하여 세부사항을 이행하도록 하고 있다. 아직 세부사항의 이행에 있어 나라마다 차이도 심하고 예상보다 더딘 상황이라 하지만 적어도 아편이라 하는 건 지나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말이 SDGs 자체의 활동보다는 이것이 담는 가치를 자본이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일종의 비판이라면 어느 정도 수용 가능 할듯 하다.

기후 변화가 후대에 미칠 영향이 얼마나 클지 고려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커다란 변화'를 추구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은 ‘커다란 변화'란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다.(22)

지구환경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문제를 좀 더 세계체제의 측면에서 환경 문제를 보도록 하자.

월러스틴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구성된다. 글로벌 사우스라는 주변부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생산물을 마구 사들임으로써 중심부는 다욱더 큰 이윤을 올려왔다. (중략)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더 나아간 이야기이다. 월러스틴이 주로 다룬 착취 대상은 인간의 노동력인데, 그래서는 자본주의의 한쪽 면만 살펴본 것이기 때문이다.(30)

세계체제가 저렴한 노동력을 찾기 위해 주변부를 이용한다는 측면을 보는 관점을 좀 더 다른 차원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지구 환경에 대한 착취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본질적 측면, 그것은 지구 환경이다. 자본주의가 착취하는 대상은 주변부의 노동력뿐 아니라 지구 환경 전체인 것이다. 선진국은 자원, 에너지, 식량 모두 ‘부등가 교환'을 하면서 글로벌 사우스에서 앗아가고 있다. 인간을 자본 축적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주의는 자연 역시 약탈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적인 주장 중 하나다.(30-31)

저자는 지구 환경을 착취로 하는 사례로써 팜유를 예로 들고 있다. 팜유의 주생산지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는 팜유의 원료인 기름야자를 재배하기 위해 열대우림을 난개발하며 밀림을 급속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31). 열대우림의 농장 개간으로 인해 비료와 농약이 하천으로 흘러들어 하천 생태계를 파괴했 하천의 물고기를 주로 섭취해온 지역민들의 삶까지 파괴했다(32).

적극적 방관주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밀림 개간과 환경 파괴에 대해 선진국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가질까? 사실 아무 입장이 없다고 봐야 한다. 거기서 얻는 풍요를 놓지 않으려 적극적 방관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진국인 대한민국 사람들도 이를 반성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진국 사람들이 단순히 환경 부하의 ‘전가'에 대해 ‘무지'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제국적 생활양식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며 점점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무지한 상태에 있길 욕망하며, 진시로가 마주하길 겁내게 되었다.(33)

글로벌 사우스와 네덜란드의 오류

그렇지만 역시 풍요를 손해보면서까지 환경을 보호하는데에는 주저함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경제성장도 하면서 환경도 보호한다는 루트에 대해 선진국 사람들은 기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경오염을 줄이면서 경제 성장도 이루었다고 선진국이 자축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오류’다. 선진국의 환경오염이 개선된 것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의한 결과가 아니며, 자원 채굴과 쓰레기 처리 등 경제 발전에 따라오게 마련인 부정적 영향의 적지 않은 부분을 글로벌 사우스라는 외부로 떠넘긴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35)

여기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란 자본주의 세계화로 피해를 보는 남반구인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콩고 민주공화국은 코발트 사례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코발트는 전기차 등의 배터리에 사용하는 리튬 이온 전지의 핵심재료이다, 콩고는 세계에서 코발트 생산의 70%를 차지하는 곳이다, 그런데 콩고는 코발트 채굴 과정에서 아동노동, 저임금, 환경파괴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선진국은 아동 착취를 하지 않으며 환경파괴를 하지도 않으며 코발트를 사기만 하므로써 환경을 지키지만 이 코발트를 생산하는 콩고에서는 그것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글로벌 사우스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네덜란드의 오류는 선진국이 환경파괴를 낳는 기술을 주변부 국가로 이전하고 전가한 후 “우리나라는 환경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말한다.

국제적인 전가를 무시한 채 선진국이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네덜란드의 오류'이다.(35)

기술적 해결법은 회복이 아니라 전가이다

위에서 글로벌사우스와 네덜란드의 오류를 살펴보면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을 것이다. 과연 “기술”이 환경 문제를 일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컨대 배기가스를 배출하여 지구환경에 탄소를 높이는 내연기관 자동차에서 전기자동차로 기술을 발전시키면 탄소 문제를 개선할 수 있지 않는가?

고헤이는 이런 물음에 기술적 해결법이 환경문제에 대한 회복이 아니라 전가라는 사례를 들어 반박하려 한다. 이는 먼저 리비히가 ‘보충의 법칙’이라 하여 토양 양분이 순환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토양의 순환을 무시하고 단기 이윤을 위한 농업 경영이 우선되어왔다. 리비히는 이를 ‘약탈농업'이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역사를 보면 리비히가 경고한 대로 토양 피폐에 의한 문명의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왜일까? 20세기 초반에 ‘하버-보슈법'이라는 암모니아 합성법이 개발되면서 화학비료가 저렴하게 대량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버-보슈법'이 개발되었다고 해서 순환의 ‘균열'이 회복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전가'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하버-보슈법으로 암모니아를 제조하려면 대기 중 질소뿐 아니라 화석연료(주로 천연가스)에서 유래한 수소도 필요하다. 전 세계의 농지만큼 비료를 제조하려면 당연히 막대한 화석연료가 쓰일 수밖에 없다.(중략) 물론 암모니아 제조 과정에서도 이산화탄소가 대량 발생한다. 이것이 기술적 전가의 본질적인 모순이다.(43)

이 사례를 보면 전기자동차는 배기가스를 배출하지 않지만 이 배터리의 생산에 콩고의 저임금, 아동노동 착취, 환경 파괴를 낳는다는 점 때문에 일종의 전가라는 사실에 이견을 내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배기가스는 직접 배출인 것이고,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연히 탄소가 생성되기 때문에 이것도 계산을 해봐야 하는 거다.

실제로 원료를 채굴하여 전기자동차를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석유가 연료로 쓰이며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전기자동차 때문에 증대하는 전력 소비량을 감당하기 위해 더욱 많은 태양과 패널과 풍력발전 설비가 필요해질 텐데, (중략) ‘제번스의 역설'인 셈이다. 결과적으로는 환경 위기가 악화될 것이다. (중략)IEA(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현재 200만 대인 전기자동차가 2040년에는 2억 8000만 대까지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줄어드는 건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불과 1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한다.(90)

경제규모 축소와 속도 둔화

고헤이는 기술적 해법을 불신하고 경제성장에서 벗어나 경제규모의 축소와 속도 둔화를 주문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린 뉴딜이 진정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제 성장이 아니라 경제의 규모 축소와 속도 둔화다. (중략) 반대로 무한한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는 그린 뉴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멸종에 이르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96)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단순히 축소라고 해서 과거 에컨대 다시 1970년대 수준으로 돌아가자는 식이 가능할까. 일단 고헤이는 그러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제2장에서 언급했듯이 기후 위기 대책의 일환으로서 생활수준을 1970년대 후반 수준까지 낮추자는 주장이 있다. (중략)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바로 1970년대에 심각한 체제 위기에 빠졌었다. 그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신자유주의라는 정책 패키지가 전 세계에 도입되었던 적이 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1970년대의 자본주의'로는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간다 해도 자본주의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피하기에 같은 단계에 머무르지 못한다.(118-119)

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손으로 자본주의를 멈추고 탈성장형 포스트 자본주의를 향해 대전환을 하는 수밖에 없다”(119).

커먼과 지구 관리

고헤이는 우선 이 대전환의 기초적인 개념으로서ㅓ ‘커먼'을 제시한다.

‘‘커먼'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를 가리킨다.(중략) ‘커먼'은 미국형 신자유주의와 소련형 국유화 모두와 대치하는 ‘제3의 길’을 여는 데 중요한 열쇠라고 해도 무방하다.(144)

이제 이 커먼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구를 전체를 관리하는 개념으로 확장한다.

코뮤니즘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추구해 지구를 황폐하게 만드는 자본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다 함께 지구 전체를 ‘커먼'으로 삼아 관리하자는 것이다.(146-147)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 그리고 생산력주의

그러므로 생산력 지상주의의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고르츠는 말한다. ‘열린 기술'이란 ‘커뮤니케이션, 협업, 타자와 교류를 증진하는’ 기술이다. 그에 비해 ‘닫힌 기술'은 사람들을 분단시키고 ‘이용자를 노예화하며' ‘생산물 및 서비스 공급을 독점하는' 기술을 가리킨다.(227)

고헤이가 대표적인 닫힌 기술로 원자력 발전소를 꼽는 것(227)은 흥미롭다. 이는 닫힌 기술의 민주화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게도 해준다. 이에 대한 고헤이의 의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제란, 상상력을 되찾기 위해 ‘닫힌 기술'을 뛰어넘어서 GAFA(Google, Apple, Facebook, Amazon) 같은 대기업의 지배를 피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열린 기술'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닫힌 기술'로 인한 하향식 정치주의의 유혹을 이겨내고 자주 관리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는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230)

공동 소유 및 공동관리로서의 커먼즈

고헤이는 커먼즈라는 개념을 얘기한다. 커먼즈란 모두가 공유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유재를 의미한다. 본원적 축적 이전에 커먼즈가 있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본원적 축적이 시작되기 전에는 토지와 물 같은 커먼즈가 풍요롭게 있었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무상으로 필요한 만큼 이용할 수 있었다.(243)

본원적 축적은 이러한 커먼즈를 파괴했다는 것이 고헤이가 포인트로 삼는 지점이다.

마르크스는 ‘본원적 축적'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전사'로 다루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은 커먼즈를 해체하여 이뤄지는 인공적 희소성의 창조야말로 ‘본원적 축적'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이다.(250)

즉 수력을 통한 풍차 발전이라는 공동관리와 달리 본원적 축적은 일종의 자원의 희소성을 만들었다(240-242)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고헤이의 코뮤니즘은 커먼즈를 복구하는 것(257-258)이 된다.

즉, ‘커먼'의 목표는 인공적 희소성의 영역을 줄이고, 소비주의, 물질주의와 결별한 ‘근본적 풍요'를 늘리는 것이다.(265)

여기서 ‘근본적 풍요'란 고헤이가 탈성장을 탈풍요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기 위해 내세우는 개념으로 보인다. 이는 일종의 화폐 경제가 아닌 질적인 측면인 것 같다.

‘근본적 풍요'가 회복될수록 상품의 영역은 좁아진다. 그렇기에 GDP는 감소한다. 탈성장인 것이다. 그런 탈성장은 사람들의 생활이 가난해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물로 지급되는 영역이 늘어나 화폐에 의존하지 않는 영역이 확대될수록 우리를 항상 짓누르는 노동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더욱 많은 자유시간을 누릴 것이다. 안정된 생활을 획득하면 상호부조를 할 여유가 생겨나고 소비주의적이지 않은 활동을 할 여지가 넓어진다. 운동을 하거나 등산과 원예 등으로 자연과 더 자주 접할 수 있다.(265-266)

여기서 “현물로 지급되는”, “비-화폐경제"라는 점에서 조심히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바로 정부에서 복지적으로 지급되는 식이 아니라 커먼즈 경제이기 때문이다.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공유경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미시적 삶을 바꾸는 것처럼 진술하는 데에는 상당한 판타지라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좀 더 가볍게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나 싶지만,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치우침과 판타지는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 : 커먼즈에는 더 많은 공공 노동이 대응된다

고헤이가 예로 든 코펜하겐의 공공 과일나무 사례를 보자.

예컨대 2019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은 누구나 무료로 먹어도 되는 ‘공공 과일나무’를 시내에 심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시 전체가 도시 과수원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로 설명하지 못할 ‘근본적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다.(293)

나는 이 사례를 보며 과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말 그대로 공유지의 비극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도토리를 생각해보자. 보통 노년 세대들은 공유지에서 마음대로 가져가보던 경험을 한 세대들이다보니, 등산을 하면서 산에 널린 도톨이를 자연스럽게 대량 수거해간다. 이런 생각없이 한 행동이 다람쥐들이 굶어 죽는 사태를 만들어버린다.

이런 이유로 커먼즈의 가능성은 이기주의 행위(자원의 고갈, 공공 노동에 대한 태만 등)를 어떻게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것이 적절한 수준으로 효율적인가에 따라 제약이 따를 것이다. 이렇듯 고헤이는 커먼즈를 관리하는데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근본적 풍요'에는 “더 많은 공공 노동”이 대응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나는 자본주의적 분업화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더 많은 공공 노동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한다. 현재 공공 노동을 복지제도로 사용하는 것은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업을 더 강화하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런 공공 노동 영역을 자동화 등으로 효율화하여 경제적 영역으로 내버려두기보다, 인간이 시민으로서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역할로 고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 고헤이는 노동의 본질을 바꿔 매력적인 것으로 바꿀 필요성(304)을 제기하는 점은 참고해볼만 하다.

여가를 위한 자유 시간을 늘릴 뿐 아니라, 노동 시간에서도 고통과 무의미함을 없애자는 뜻이다. 그러면 노동을 더욱 창조적인 자기실현 활동으로 바꿀 수 있다.(305)

-끝-

  1. 齋藤 幸平. (2020). 人新世の「資本論」. 集英社. 2020-09-17. (국역본)사이토 고헤이. (2021).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김영현 번역. 다다서재. 2021-10-19 발행.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