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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페미니즘 이론서를 보게 되었다. 페미니즘 이론을 잘 읽지 못한 나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대표적인 저서인 千鶴子(2010)[각주:1]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여성 혐오에 대한 이론이 다양한 의제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보아오던 대중적인 페미니즘 서적에서 채울 수 없었던 이론적 공백이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치즈코는 개똑똑한 것 같다...

아무튼 이론적인 쪽으로 길더라도 내가 나 스스로 중요하게 본 내용들을 정리하여 전개해볼까 한다.

1. 여성 혐오와 호모소셜

 1-1. 여성 혐오는 무엇인가

저자는 여성 혐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지만 여성 혐오는 남녀에게 있어 비대칭적으로 작용한다.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이기 때문이다.[각주:2]

저자는 우선 여성 혐오가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란 점에서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을 지칭하는 '호색한'을 검토한다. 저자의 검토의 결과는 결국 호색한은 일종의 여성 멸시가 기초하며 성적 주체를 기반으로 하여 여성을 성적 객체화한다는 것. 이것을 좀 더 심도깊게 이해하려면 저자가 자주 참고하고 있는 이브 세지윅(1985)[각주:3]의 이론을 언급해야겠다.

 1-2. 호모소셜과 호모섹슈얼

먼저 호모소셜과 호모섹슈얼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호모소셜homosocial은 남성 간 유대를 뜻하며, 호모섹슈얼homosexual이란 남성 간 성애 즉 동성애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단어만 보자면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지만 남성간 유대라는 것은 결코 호모섹슈얼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치즈코는 호모소셜을 '성적이지 않은 또는 호모섹슈얼을 억압한 남성간 유대'[각주:4]라고 풀이하는데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호모소셜은 호모섹슈얼을 억압해야 했을까? 바로 동성애 자체는 비대칭성을 가졌기 때문인데 바로 삽입하는 자와 삽입당하는 관계로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삽입하는 이는 성적 주체이며 삽입당하는 이는 성적 객체가 된다.

삽입당하는 것, 소유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성화 되는 것feminize'이다.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화 되는 것. 즉 성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객체로] 전락하는 것이었다.[각주:5]('[' ']'는 인용자)

즉 호모소셜적 연대란 성적 주체 간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남자들만 모이는 무리 속에서 (그것이 군대이든 직장에서든) 성적 농담이 이루어질 때, 그 내용을 생각해보면 대체로 여성을 휘어잡았다든가 하는 식의 말들이 주를 이루는가를 생각해보았을 때 이런 언명 자체가 바로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로서 호모소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 게이물을 보며 즐기는 남성 간 유대는 호모소셜의 반례인가?

세지윅의 호모소셜에 대한 이론은 상당히 설명력이 높은 측면이 많다. 그러나 다른 반례가 떠올랐다. 즉슨 어째서 게이 유머물을 남자들끼리 공유하고 있는가였다. 예컨대 '소방차 게임' 같은 저열한 개그물도 남성들 간에 충분히 공유하고 같이 웃기도 한다.

좀 더 생각해보니 개그가 성립하는 조건들을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우선 성적 주체인 게이는 굉장히 강하고 힘이 쎄고 우락부락한 남자여야 한다. 그에 비해 이 게이가 유혹(아니다. 성추행이다.)하려는 피해자는 매우 연약하고 힘도 약하지만 약삭빠른 남자여야 한다. 이 구도에는 삽입하는 자와 삽입당하는 자가 있다. 남자들은 이 기표를 즐기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남자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여기서 연약한 남자를 몇몇 남자들이 성행위를 흉내내는 등 성희롱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 적이 있다. 이 행위는 그들이 게이라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괴롭힘. 즉 성적 주체로서 성적 객체를 중심으로 호모소셜을 강화하는 연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라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나는 오히려 주체란 말보다 '지배하는 주체'로 풀이하여 이것이 폭력적임을 시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게이물을 남자들이 공유하며 재밌게 웃는 형태 자체는 호모소셜의 반례라기보다는 강화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남자는 성적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런 유머물을 보고 불쾌하게 받아들이면 곧바로 "너 게이냐?" 같은 말이 되돌아 올 수 있다. 그런 반응은 결국 삽입당하는 자의 불쾌함과 같으며 이를 보고 웃을 수 있는 무리는 삽입하는 자의 연대가 되므로 곧 바로 "너 게이냐?" 같은 말을 되던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물을 보며 웃는 남자들의 행동은 호모소셜의 반례가 아니라 증거라는 것이다.

 1-4. 호모소셜은 호모포비아와 여성 혐오라는 이중적 감성을 공유한다

세지윅의 이론이 가장 설명력이 높은 것이 왜 남성 간 유대는 호모포비아와 여성 혐오라는 이중적 감성에 기초하는가에 대한 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성들은 왜 레즈비언보다 게이를 더 싫어하는가? 아니 오히려 레즈비언에는 큰 불쾌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바로 호모소셜이 성적 억압을 통해 남자집단이 유대한다는 점에서 게이는 이 유대를 헤치고 자신들이 언제든 삽입당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호모포비아가 남자무리에서 깊숙히 자리잡을 수 있던 이유가 된다. 트위터에서 이와 관련한 농담을 봤는데, "게이라고 해서 자신을 좋아할까봐 겁을 내는데 여자도 싫어하는데 게이라고 당신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설득에도 남자들은 뭔가 무의식적인 층위에서부터 게이를 증오하고 경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자무리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가장 큰 매개물이 바로 호모소셜이기 때문이다.

2. 진짜 사나이가 될 수 있는 남성의 자격조건

 2-1. 인기 없는 남자

방송 토크쇼에 출연한 여자 패널이 말했다. "키 작은 남자는 싫어요. 요즘 키가 경쟁력인 시대에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이 말에 열받은 루저들에 의해 그녀의 신상과 관련된 모든 것이 털리기 시작했다. 이 일은 09년도에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명 루저남에 대한 발언으로 남성 무리들은 왜 발끈한 걸까? 그리고 뒤이은 그들의 신상털기 행동은 아주 지나치고 도를 넘은 극악무도한 짓이었기도 했다. 그들은 어떤 심리로 이런 행동을 벌인 걸까? 따지고 보면 여성이야말로 이런 외모지적에 무차별하게 노출되어왔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한남들에게 외모지적이 '한 번' 돌아오는 순간 아주 씨를 말라버릴 목적으로 극렬한 반응을 한 것이다. 마치 피지배자인 여성에게서 지배자인 남성에게 한 번 대드니까 아주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행동의 유래에는 일종의 '성적 약자론'이 있는 것 같다. 옛날의 결혼제도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로 부모들이 지시를 내려서 혼인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치즈코의 표현대로 현대의 결혼이란 바로 '자유시장'과 같다. 따라서 여기에는 일종의 매력자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물론 돈과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결혼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애의 자유시장이 보편화된 현대에서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욕망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연애를 하는 것이 희소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란 그런 희소함에서 얻는 이득을 넘어서 대단한 크기로 욕망되는 것 같다. 치즈코는 이런 비인기남으로서 아키하바라 길거리 무차별 살상자인 남자 K군의 이야기를 꺼낸다. K군이 아키하바라로 향하기 직전에 인터넷 게시판에 남긴 글의 발췌문이다.

"얼굴만 좀 더 괜찮게 생겼다면 여자 친구가 있었을 것이고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성격도 비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직장을 가지고 집과 차를 굴리며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얼굴이 모든 것의 원흉이다."[각주:6]

저자도 지적하고 나도 생각했지만.. 상황은 반대일 거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는 놈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자에게 있어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학력이 없어도, 직장이 없어도, 수입이 없어도, '여자 친구만 있으면' 왜 역전타를 날릴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여자 친구만 있으면 '나는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각주:7]

저자의 견해는 이렇다. 남자집단에서 내가 남자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단순히 여자에게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남자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이 아닌 남자들이 남자로 인정해야 진짜로 인정받는 것이 된다. 그것은 바로 여자 친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남자로 인정받는 자격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저자는 재밌는 이야기를 한다. 돈과 명예를 모두 소유하고 있는 남자라 하더라도 여자 하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남자는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각주:8]. 매우 적절한 지적이 아닐까? 아무리 돈과 명예를 갖는 남자라도 여자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는 남자를 상상해보자. 이는 남성들 사이에서 무척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나 역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2. 격차혼

또 다른 남성의 판타지가 있다. 바로 돈이 없어도 너 하나는 내가 책임질 수 있어, 같은 식의 말에 현혹되는 여자. 진정한 나의 사랑을 알아주는 여성을 욕망한다는 것. 중요한 키 포인트는 "돈이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어쨌든 이런 격차혼의 예가 바로 K군의 사례와 반대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치즈코는 파워여성이 돈도 명예도 없는 남성과 결혼한 예를 하나 꺼낸다. 바로 탤런트 후지와라 노리카와 개그맨 진나이 도모노리의 사례인데, 이들의 결혼은 2년 뒤 진나이의 불륜과 가정 폭력으로 이혼에 이른다. 미숙하고 유아적인 남편이 '파워를 가진 아내'를 발로 차므로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려 했던 것 같다.

이 사례는 웃기게도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잘 성립될 조건에 대해서 힌트를 준다. 예컨대 좋은 배우자는 "연봉 6천만 원 이상"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이 말은 곧 남자가 그 정도를 못 벌면 자존감이 안 살고 구실을 못한다고 봐야겠다. 즉 이 말을 하는 것 배후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여야 하며 여성의 입장에서 안심하기 위한 수동적인 '조건'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일명 루저남, 비-인기남, 마법사 등의 표현들은 일종의 호모소셜적인 은유라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 친구를, 아내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진짜 사나이로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의 표현이라는 것.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자 K군과 키 작으면 루저남이라고 말한 여성에 대해 신상털기로 악랄한 대응을 한 루저들의 심리는 바로 이러한 호모소셜에 기반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2-3. 남성이 멸시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인 어머니

어린 시절 내 기억에 가장 남는 문화가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약속을 해야 할 때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며 엄지를 내밀었다. "그거 진짜가 아니라면 엄창이다"

엄창의 의미는 "그게 거짓말이면 너희 엄마는 창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남자 아이들에게도 대단한 모욕임과 동시에 그만큼 그가 진실을 말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를 보기 위해 그런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모욕적인 것을 걸만큼 너의 말은 진실한 것인가?임을 묻고 있다는 것.

군대 훈련소에서 유격훈련을 하기 시작한다고 하자. 거기서 PT 8번을 할 시점에 교관이 말한다. "지금 너희들이 이러고 있을 때 너희 어머님께서는 너희를..." 그때부터 주변에서 펑펑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자대에서 유격받을 때 교관이 이런 소리를 안한다..

아무튼 그만큼 남자들에게 어머니는 유일하게 여성 멸시를 할 수 없는 성역이다. 왜 그럴까? 치즈코가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거래 모델'을 가지고 고대사를 분석하는 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고대사를 보면 항상 국가의 창조자는 외부에서 온 것(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부화되거나 등)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그가 태생이 존재한다면 그는 창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논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대사의 논리를 대입해보면 결국 어머니는 남자 자신의 근본이기 때문이고 자신이 탄생한 본원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낳은 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멸시하도록 기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을 멸시하는 것은 가능해도 어머니를 멸시하는 것은 남성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근본'을 더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각주:9]

이러한 "자기 본질"이라는 생각에 기초해보면 왜 호모소셜 사이에서 '엄창'이 굉장한 모욕인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저자가 지단이 마테라치에게 박치기를 한 사건을 예로 드는데 사실 마테라치는 어머니를 창녀라고 한 건 아니고 누나를 창녀라고 욕한 것으로 정정되어야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창'이라는 욕이 남자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이유는 분명 '본질'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에게도 당연히 그것은 모욕적인 말임에는 분명하다. 중요한 건 남성이 어머니에게 갖는 감정이 여성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 이는 프로이트의 '거세공포'로 설명할 수는 있다. 남성의 최초의 사랑은 어머니에 투사되지만 이것은 곧 아버지에 의한 거세위협으로 무너진다는 것.

이제 자기본질을 좀 더 호모소셜에 부합하여 설명해보자. 어머니란 자기 본질이다. 그런데 만약 어머니가 미혼모이거나 창녀라면 호모소셜 사이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가 '엄창'이라는 약속을 햇던 중대한 이유는 어머니가 창녀가 아니라는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혼모 역시 "행실이 바르지 않아 아이를 임신한" 경우로 창녀에 빗대어 사고하고 있을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웃기는 건 아이를 임신시키고 도망친 아버지에 대한 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후 메갈리아에서 이를 "싸튀충"이란 욕을 창조하기 전까진 말이다). 따라서 미혼모와 창녀의 아들의 경우는 호모소셜에 속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을 정부의 저출산 대비 정책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 태어나는 방식이 어떠하든 간에 아이는 아이이다. 기묘하게도 작금의 저출산 대책을 보고 있자면 결혼의 장려와 기혼 여성의 출산 장려는 있어도 혼외 아이의 출산 장려 같은 정책 캠페인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다.  (...) 진짜 캠페인을 할 마음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즉 아이가 태어나는 것 자체보다 가부장제를 지키는 것이 아직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각주:10]

 1-5. 여자 두목은 무엇인가

이것은 치즈코의 저서를 읽으면서 내 개인적인 궁금증의 소희에 관한 것이다. 일명 영화 「조폭마누라」, SBS 드라마 「작은 아씨들(2004)」의 사채업자 두목으로 나오는 유선 등등 이와 같이 '여자 두목'은 과연 어떤 의미로서 남성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여성의 신체를 갖는 여자가 어떻게 남자들이 지배-피지배 관계로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징인 조직폭력배 속에서 여자 두목으로 나타나는 상황은 무엇일까. 이 사례는 위에서 밝힌 루저남을 말한 여성에게 가한 남자들의 뿌리 자르기 행위와는 다른 것 같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여성두목을 목전에 두고 아무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 '재미'로서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 치즈코는 남성이 성적 욕망을 갖는 것이 '기호'라는 점을 밝히는데, 예컨대 여성의 다리인지 남성의 다리인지 모를 다리가 나왔다고 하자. 남자는 그것이 실제 어떻든 간에 그 다리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유머영상은 의외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영상에서 매우 놀라게 된다. 우리가 성적 매력을 느끼는 그것이 그토록 도착적임을 증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호'라는 점에 착안해보면 여자 두목은 여성의 신체를 갖지만 조폭 두목으로서의 기호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예컨대 SBS 드라마 「작은 아씨들(2004)」에서도 유선이 방송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면서 두목역할은 막을 내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거기에서부터 그녀의 여성성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때부터 우리는 두목의 기호를 잃은 여성성을 갖는 유선을 만나게 된다. 「조폭마누라」의 경우도 그렇다. (생각해보니 제목이 이상하다. 왜 조폭 마누라인가? 주인공 차은진은 조폭 두목인데 말이다) 이 영화의 경우는 성 역할을 정반대로 하긴 한다.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틀릴 수도 있겠는데 내 기억으로 남편 강수열은 여성적인 상징을 대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아이를 육아하고 아내가 일하다 돌아오면 밥을 차려준다(?). 즉 기호적 측면에서 여자 두목이란 바로 남성성의 상징인 것이므로 이러한 매체물이 남자들에게 크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3. 여성의 자기 혐오

여태까지 남성의 여성 멸시에 대해 다루었다면 이 챕터에서는 여성의 자기 혐오에 대한 감정을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여성들의 자기 혐오의 매커니즘은 단순해보이지 않으며 내용이 복잡해보인다. 이 부분은 나 역시 좀 더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3-1. 부양 의무를 덤으로 지고 있는 여성

저자는 첫째로 여성의 자기 혐오를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딸은 어머니로부터 여성 혐오를 배운다. 어머니는 딸의 '여자 같은 부분'을 증오함으로써 딸에게 자기 혐오를 심어주고 딸은 어머니의 불만과 공허를 목격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각주:11]

치즈코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어머니는 여성이 어머니가 되므로써 치뤄야 했던 대가를 아들에게 요구한다. 딸의 경우 투자를 해봐야 어차피 다른 집 사람이 될 사람이 된다. 이것은 근대화 초기의 가족의 보편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경제 참여율이 높아지는데,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이 더 큰 부담을 안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노후에 누가 나를 보살펴주었으면 좋겟는가'라는 질문에 며느리보다 딸을 꼽는 사람의 비율이 늘어난 과거 10년 간, 딸이 떠맡아야 할 돌봄 역할의 하중은 며느리 못지않게 무거워지고 있다.[각주:12]

우리 가족도 그렇다. 형들은 어머니에게 돈을 줄 것은 주고 있으나 집안일과 관련된 일은 누나 말고는 누구도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부끄럽게도 나 역시 포함된다) 며느리에게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지나고 있고 그런 과도기에서 고부 간 갈등 사유로 이혼하는 비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특정한 계절적 요인인 명절 이후에는 이혼 신청이 급증한다고 하는 걸 보면 이러한 고부 간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어머니들이 자신을 부양할 사람을 옛날처럼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보는 것은 신뢰성 때문일 것이다. 핏줄은 그 무엇과 대체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더더욱 폭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여성의 경제활동이 높아짐과 동시에 그러한 '슈퍼우먼'의 상징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양의 의무가 왜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지어야 한다고 하는 걸까. 이러한 것에 성차별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남자들은 공유해야 할 것이다.

 3-2. 여학교와 노파의 가죽. 그리고 여적여

치즈코의 설명에 따르면 노파의 가죽이란 일본 전래동화에서 미녀가 어떤 재앙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를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박씨부인전」과 비슷한 것 같다. 저자의 설명은 여학교에서의 생존전략이 바로 '노파의 가죽'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여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표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생존전략적 행동의 배후에는 바로 '남성이 부여한 가치'에 준하고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성이 선택한 가치 기준에 부합하는 면모라면 그것이 여학교 내부에서 여성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은 결국 아주 단순한 척도로 기능하는 남성들의 호모소셜한 남성연대와 다르게 비극적인 연대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파의 가죽'이란 이 '여성 내 인기'를 얻기 위한 변신 도구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성에게 인기를 얻는 (그것이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여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업 평가와 여성성 평가와 여성 그룹 내 평가의 관계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여성 세계는 이들 척도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때문에 여성 세계는 남성 세계의 그것[호모소셜]처럼 일원적인 가치 척도로 잴 수 있는 호모소셜한 집단을 형성하지 않으며 또 형성할 수도 없다.[각주:13]

이것이 바로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야!)를 남자들이 얘기하는 이유이다. 여성들은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러한 분열이 남성의 가치기준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매우 섬세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여적여에 대해 대항하는 이유 역시 그것이 여성 간 연대의 의미를 제한하려는 의도로 간주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3-3. 도쿄전력 OL의 사건과 자기 혐오

저자는 도쿄전력 OL 사건을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많은 내용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여성의 자기 혐오에 대한 문제로 생략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97년 3월 19일. 시부야 마루야마초의 낡은 목조 아파트에서 한 길거리 매춘부가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그 여성은 게이오 대학 졸업에 도쿄전력 커리어 직에 근무하던 A 씨였고 이것이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커리어가 높은 그녀가 왜 시부야의 길거리에서 매춘 일을 해야 했는가? 이에 대한 정신의학자 사이토 마나부의 인터뷰들을 주로 검토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내용을 언급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치즈코는 이 일을 일종의 여성의 자기 혐오로 풀이하고 있다.

'아버지의 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딸'일 수밖에 없으며 '아들'이 될 수 없다. 자신이 불완전한 아버지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딸은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방해하는 여성 신체를 벌하려고 한다. (...) 아버지를 혐오하는 딸은 아버지에 속해 있는 자신의 신체를 '더럽힘'으로써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이 경우 매춘은 타벌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벌이나 타벌 모두 딸의 자해 행위를 통해 달성된다. [각주:14]

일본에서 성별 기회균등법의 시행으로 도쿄전력은 여성을 균등하게 취업시켰고 이 A 씨는 최초의 균등한 기회를 얻은 1세대 여성종합직 노동자였다. 그러나 회사는 그녀를 '아가씨'로 취급해야 할지 '다른 종류의 남자직원'으로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았다고 한다.[각주:15]  당시 1세대들이 부당한 처우와 차별로 이직한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지금의 한국에서 큰 차이가 있을까 싶은 점이다. A 씨가 매춘을 시작한 계기는 회사가 한 조사회사로의 파견을 발령받은 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 직무는 동기 남자 직원들의 일과 비교해보면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A 씨의 아버지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하고 그가 죽은 후 장녀로써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입장이었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남성'이 될 수 없는 신체를 가지고 있고 그렇다고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여성으로 분별되는 '여성종합직'으로서 아버지의 유명세에 비할 수 있는 수준으로 비즈니스계에서 성공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최악의 선택으로서 그 신체를 벌하는 것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성평등 기회균등법 이후 또는 한국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비율이 높아진 이 시대에 현대 여성은 두 가지의 욕망을 갖는다.

여성은 개인으로서의 달성과 여성으로서의 달성.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지 않으면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각주:16]

이러한 불합리함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숙고해보아야 한다. 남성은 이러한 역할을 분담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남자가 여자의 역할을 도와줘야 한다는 말 역시 아니다. 상황은 그 반대이다.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을 바로 연결짓고 있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에 나왔듯이 남자가 여자의 일을 "도와준다"는 말 자체도 여성의 성역할을 각인하고 그 관념을 포기하지 않는 끈덕진 논리라는 것 역시 우리는 반성해야한다. 모두가 일을 하는 형제자매임에도 "누나가 여자니까 어머니를 도와줘." 같은 말이 쉽게 들리는 요즈음 이런 사태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야겠다.

 

4. 결론

사실 남자로서 남성의 관점이 풀어진 점들에 유독 눈길을 많이 줬고 그만큼 관심있게 독해했던 것 같다. 여성에 대해 말한 부분은 일정정도 매우 조심히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1)내가 여자로서 살아본 것이 아니며 (2)치즈코는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이고 (3)세대가 다르다는 점에서 조심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꽤 유용한 이론을 얻은 것 같아 매우 기쁘다. 다음으로 내 관심은 결국 계급과 젠더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관계지을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긴 하다. 치즈코도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로 스탠스를 정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주로 대중적인 코드를 가지고 주로 이야기 된다. 물론 학문적 내용도 많아서 괜찮은 입문서로 보인다.

무엇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단순한 여성 혐오에 대한 지식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남자집단에서 느꼈던 어떤 불합리함이 이러한 책에서 자주 다루고 있고 그리고 나 역시 많은 지점에서 반성할 게 한 둘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물론 안다고 해서 여성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치즈코는 "여성 혐오에서 벗어나는 방법" 따위의 챕터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그런 것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스탠스를 취한다면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인식의 문제로 자리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개인적 의식 역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성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수준에서라도 자기의식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불합리한 성차별에 대해 여성 혐오에 대해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한 그 역할이란 결국 남성집단 내에서의 호모소셜에 대한 비판부터 출발하고 싶다. 이 책 덕에 내게 더 할 수 있는 말들이 많아졌고 일정한 논리적 도구인 이론을 얻은 것이 가장 기뻤던 점이다.

[이관 글. 2017-04-12 작성]

  1. 上野 千鶴子. 女ぎらい: ニッポンのミソジニー. 紀伊國屋書店, 2010. 나일등 역 (2012).<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서울: 은행나무 [본문으로]
  2. 上野 千鶴子. (국역서). Ibid. p15. [본문으로]
  3. Sedgwick, Eve Kosofsky. "Between men: English literature and homosexual desire." (1985). [본문으로]
  4. 上野 千鶴子. op.cit. p34 [본문으로]
  5. 上野 千鶴子. Ibid. p37. [본문으로]
  6. (5월 8일 오전 5시 3분). 上野 千鶴子. Ibid. p76-77 재인용. [본문으로]
  7. 上野 千鶴子. Ibid. p79. [본문으로]
  8. 上野 千鶴子. Ibid. p80. [본문으로]
  9. 上野 千鶴子. Ibid. p153. [본문으로]
  10. 上野 千鶴子. Ibid. p154. [본문으로]
  11. 上野 千鶴子. Ibid. p168. [본문으로]
  12. 上野 千鶴子. Ibid. p170. [본문으로]
  13. 上野 千鶴子. Ibid. p221-222. [본문으로]
  14. 上野 千鶴子. Ibid. p240-241. [본문으로]
  15. 上野 千鶴子. Ibid. p234. [본문으로]
  16. 上野 千鶴子. Ibid. p24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