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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럴드 앨런 코헨(1981)[각주:1]에 나오는 제 5장 물신주의(p225)에 대해 정리 및 노트한 것이다.

상품물신주의

물신이란 종교에 관한 담론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즉 철학에서의 종교비판의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예컨대 물신이란 실제로 능력을 갖지 않았으면서 그것이 타고난 것으로 지각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실제로 대중에게 그것을 경험시킬 수도 있다. (파스칼의 "일단 신에게 무릎을 꿇어라"를 생각해보면 된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하더라도 그것은 경험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담론을 경제영역에서까지 찾아낸다. 그의 물신론에서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상품물신론일 것이다. 코헨의 경우 이것보다 자본의 물신주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무게를 두고 있다.

우선 상품물신주의에 대해 다루어보자.

상품은 교환가치를 가지나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과정과 상관없이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교환가치는 사회적 속성인데 물신주의는 이를 물질적 관계 속에서 은폐한다.

따라서 상품물신주의란 그것에 투하된 노동과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를 가지는 현상이다.[각주:2]

그렇다면 상품물신은 왜 등장하는가? 이는 상품이 가지는 물질적 특성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이 상품이 되어야 물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일반적인 사회적 형식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형식(상품교환)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비한 성격이 발생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형식에 의해 신비한 성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비교하기 위해 상품교환이라는 사회적 형식과 다른 형식을 비교해보자. 예컨대 봉건사회의 형태에서는 농노와 영주와의 직접적 관계로써 농작물의 수취 등의 사회적 형식에 기초할 것이다. 이때 그 관계는 농노와 영주의 관계로서 설정될 수 있겠다. 또한 부족사회의 경우 각자가 서로의 생산물에 기여할 것이다. 이때 호혜적인 형식으로서 부족구성원들 간에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상품시장이라는 교환 형식이 지배적인 자본주의의 경우, 여기서는 교환을 통해서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결론은 상품물신주의는 다른 사회적 형식과 비교해볼 때 상품교환 형식에서는 사람 간 관계가 상품을 통해서 맺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관계가 결여됨으로서 상품이 신비화된다는 것이다.

자본 물신주의

다른 한편으로 자본 물신주의란 자본이 스스로를 가치증식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본 물신주의라고 한다. 이에 대한 제반조건은  자본주의의 생산이 자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점. 그리고 노동이 가변자본으로 활용되는 상황과 결부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자본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소득은 마치 노동에 대한 대가로 보이도록 함으로서 그것이 노동력에 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 내용의 해방

물신주의는 자본주의를 보호한다. 노동과정에 의해 등장한 상품의 생산단계 자체를 은폐함으로서 이는 이 사회적 형식을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것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혁명이란 이 물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내용에 의한 형식의 정복"으로 묘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환가치를 부정함으로서 공산주의는 형식 속에 감금되어 있던 내용을 해방하기 때문이다. 즉 교환 너머의 내용은 바로 '인간'이다. "공산주의는 사회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종속시켜 물신주의를 파기한다."[각주:3]

공산주의에서는 자발적인 연합체 속에서 그저 자유로운 개성의 발달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어떤 것이 개인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고객에게 커피를 전달하는 하나의 노동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공산주의의 주체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한 노동을 사회적 관계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또는 그의 노동에서 얻는 소득과 그 커피가 제조된 원산지의 노동환경, 브랜드의 도덕성 등에 관심을 갖게 된다. 소비자의 효용극대화는 자신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의 충족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유관한 욕망까지 판단할 것이다.

이렇듯 공산주의는 형식을 정복하여 내용을 해방한다는 건 개인이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게 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공산주의에서은 사회적 형식 자체가 폐기하는 것인지가 궁금할 수 있다. 즉 공산주의에서는 사회적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가? 코헨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적 형식은 하나의 구조. 즉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편제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형식의 전면적 소멸이란 일종의 유토피아적 관념이다. (....) 그러나 형식의 범위의 축소 그리고 형식과 내용의 관계의 변화, 이것들은 유토피아적 관념이 아니다.[각주:4]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는 노동일의 감축을 약속한다. 따라서 경제영역에 참여하는 비율을 축소시키고 경제적 영역 밖의 활동을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발전으로 두게 된다.

여기서는 "자발성"이 중요한 포인트라는 게 중요하다. 이는 독재국가 북한처럼 사회라는 것을 정부로 독선적으로 해석하고 자발성을 제도적으로 강제로 부여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비-무관성이란 이런 사회를 생각한 건 결코 아니다. 결국 자발성이란 자기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자원의 제약 때문에 항상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 자발성 역시 즉자적인 것이라기보다 어떤 사회적인 자발성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예컨대 봉사활동의 경우가 그러한 한 예이다. 약자에 대한 죄의식괴 같은 것이 우리를 그렇게 추동할 것이다. 말그대로 칸트의 "자유로워져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이다."같은 느낌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다음의 인용문을 보면 명료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일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노동은 사회적 형식을 취하며 따라서 공산주의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일한다.[각주:5]

그렇다. 사회를 위해 서로를 위해 일하고 서로의 사정을 위해 서로 돕는 어떤 공동체적 자발성이라고 하면 어떨까. 국가의 강제제도가 아니라 공동체 내부가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하면 이는 적절한 개념일 것이다.

분업 : 내용의 해방

여기서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코헨의 분업에 대한 분석을 소개해보자. 분업은 사회구조의 억압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마르크스는 분업의 폐지를 예견한 바 있다.

나는 오늘은 이런 일을 하고 내일은 저런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결코 사냥꾼이나 어부나 양치기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물고기를 잡고 해질녘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된다.[각주:6]

마르크스는 ① 한 개인은 한 활동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② 한 개인을 어느 하나에 고정된 역할과 관련시키지 않는다. ③ 한 개인이 행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각주:7]

여기서 ②의 경우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명료해질 것이다.

예술가가 몇몇 특정 예술에만 종속되는[인용자 : 괄호 생략]것이 사라진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화가들이 아니라 기껏해야 다른 여러 활동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각주:8]

이를 분명하게 말해보자면 풀타임 화가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파트타임 화가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코헨은②가 이런 의미로서 말해지는 것을 부정한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나 '화가'라는 지위는 상정하지 않는다. 또한 '프로그래밍을 하는 일'을 수행하긴 하지만 자신을 '프로그래머'라는 지위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는 개인들이 각종 제도의 매개없이도 서로를 그리고 그 자신과 대면하기를 바랐다. 각종 제도는 사회적 역할을 고정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권력이 나타날 수 있고 베버가 말하면서 라이트가 맑스주의 계급론에 적극 반영하는 "기회독점주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것이다. 라이트는 일명 중간계급의 설정을 이와 같은 기회독점주의로 포착한다. 전문법무인, 전문기술자 등은 자신이 갖는 높은 소득이 자신이 노력한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일은 인류애를 위해 약자를 위해 공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자신을 일종의 특정 직업군 역할에 고정한다는 점이다. 그는 그 일에만 몰두한다. 과연 이를 '효율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업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노동'의 기능이라는 내용을 분업이라는 사회적 형식이 은폐한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매우 동의한다. 프로그래머는 자신이 하는 노동행위에 대해 그 자신을 그런 역할로 고정해서는 안된다. 그가 그것을 수행하는 능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또한 과학자는 남들보다 더 뛰어난 두뇌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각에서 그 자신을 그런 지위를 고정하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노동의 소외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과학자 또는 엔지니어는 대중에게 다가서야 한다"는 말은 문제를 오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역할과 지위를 고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기초할 때, 그는 "시민"으로서 대중과 대화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분야에 전문가다."라는 지위에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필요한 기초지식을 강의하는 선생이 될 수도 있고 과학적 지식에 무지한 대중과 토론하기를 원하는 시민운동가가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이 관심있는 연구주제를 연구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에만 몰두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을 과학자나 엔지니어라는 고정된 위치로 두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원한 분업이 폐지된 공산주의적 이상향일 것이다.

물론 코헨 또는 마르크스 역시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삼가고 있다. 그것은 되도록 미래의 주체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의 분업의 폐지에 대한 생각은 매우 철학적 주제에 근접한 내용이자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커버하지는 못한다. 누구나 하나에 몰두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그 안에서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식견과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분명 공산주의라는 이상향에서도 존재할 것은 분명하고 "철의 임금론에 대해 노동 숙련적, 능력적 차이에 의한 실질적 불평등" 문제를 거론했던 마르크스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역할의 고정하는 문제와 상충될 거라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는다.

예컨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수시로 자신의 직무를 이동한다. 이러한 제도는 공산주의적 이상향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을 하는 경우는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유토피아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분업에 의한 내용의 해방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적어도 어느 수준은 분업을 통한 역할을 고정에 대해 완화해야한다는 점으로 목소리를 모을 수는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분업의 폐지를 어떤 과학자, 엔지니어, 전문 법무인과 같은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문제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관점을 노동강도가 매우 강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가장 높은 노동분야를 볼 때 이는 분업의 폐지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논리라고 본다. 예컨대 축산업의 소를 잡고 해체하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PTSD를 감수하고 그 일을 할 것이다. 분업이라는 지배적인 사회적 형식에 따라 그 일과 상관없이 일하는 도시 직장인들의 편리한 고기 섭취는 분명 그들이 얻는 정신적 고통에 눈을 돌리게 만들고 은폐하게 만들 것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그것이 바로 사회적 형식이 내용을 은폐하는 매커니즘의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음식물 쓰레기의 처리, 청소 노동자, 정화조를 처리하는 노동자들은 각자가 그 역할에 고정되는 사태는 분명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우리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노동들에 눈을 돌리게 된다. 분업이 폐지된 공산주의에서는 결국 개인과 사회적 관계들에 경계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학자라고, 엔지니어라고 그러한 노동을 하지 말라는 법을 개개인들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그런 역할에 고정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관 글. 2017-07-19 작성]

  1. Cohen, Gerald Allan. "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ce." Oxford: Clarendon Press, 1981. (국역판)"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역사유물론 옹호." 박형신, 정헌주 옮김. 한길사. 2011. [본문으로]
  2. 코헨. ibid. (국역판)p231 [본문으로]
  3. 코헨. ibid. (국역판)p245 [본문으로]
  4. 코헨. ibid. (국역판)p248 [본문으로]
  5. 코헨. ibid. (국역판)p248 [본문으로]
  6. Marx. K & Engels. F. "The german ideology." pp44~45. Vol. 1. International Publishers Co, 1972 [본문으로]
  7. 코헨. op. cit. (국역판)p250-251 [본문으로]
  8. Marx. K & Engels. F. 1972. op. cit. pp431-43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