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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책표지

시작하며

해당 책[각주:1]은 세계 불평등 이론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을 담고 있다. 즉 나라간 불평등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담고 있다.

갈라진 두 도시

이런 말이 있다. "더운 나라는 게을러서 가난할 운명이다" 또는 "아프리카는 무지했다" 같은 나라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오랜동안의 편견으로 보이는 대답들이 있다. 이런 얘기는 일상에서도 간혹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다.

만약 이런 주장들을 의심해보았다면 저자들이 책에서 시작하는 이 특별한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문화와 동일한 배경, 동일한 인종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환경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매우 큰 격차가 관측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미국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 시는 미국 건강보험제도가 있고 연평균 가계 소득이 3만 달러가량이다. 법질서와 치안에 대해 다양한 정부 서비스를 당연하게 여기는 곳이다.

하지만 바로 몇 발짝 남쪽으로 향하면 이곳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소노라Sonora 주의 노갈레스 주민 역시 멕시코에서 잘사는 측에 들지만, 연평균 가계 수입은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 주민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 성인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도 수두룩하다.
[1장 - 갈라진 도시 中]

매우 인접한 두 도시는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두 도시의 주민들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져서일지에 대한 가능성을 저자들은 부정한다.

1821년 멕시코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이후 이른바 '로스 도스 노갈레스'는 비에하 캘리포니아 주라는 멕시코 영토의 일부였고, 심지어 1846년에서 1848년 사이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치르고나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 결국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와 소노라 주 노갈레스의 주민은 조상도 같고 즐겨 먹는 음식과 즐겨 듣는 음악마저 다르지 않다. 아예 '문화'마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장 - 갈라진 도시 中]

이 사례를 보니 나는 한반도의 남북한이 떠올랐다. 38선이 그어지기 전부터 한반도는 모두 동일한 문화와 동일한 환경,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조상을 둔 사람들이다. 어째서 두 나라는 몇 십년 만에 이다지도 달라진 것일까? 결코 문화와 인종의 차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차이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저자들의 주장

저자들은 이 케이스를 두고 그 차이의 핵심을 "제도"의 차이로 보고 있다.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세계 불평등 이론의 골자다.
[1장 - 세계 불평등 이론을 제기하며 中]

즉 두 노갈레스 시의 차이는 미국 정치/경제 제도와 멕시코 정치/경제 제도의 차이가 낳은 것이란 소리이다.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 남북한이 서로 다르게 발전된 원인 역시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환경자원 이론의 한계

저자들은 자신들의 "제도 차이 이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이후 다른 나라간 불평등 가설들을 검토하고 있다.

1) 지리적 위치 가설
2) 환경자원 가설
3) 문화적 요인 가설
4) 무지 가설

이 가설들에 대한 내용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가장 핵심적인 검토사항으로 볼 수 있는 쪽이 바로 "환경자원 가설"로 보인다. 바로 제레드 다이아몬드[각주:2]의 환경 자원의 차이가 나라 간 불평등의 원인이라는 가설에 대한 검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다이아몬드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대륙 문명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오랜 농경의 역사와 그에 따른 탁월한 기술 덕분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거 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땅에 사는 멕시코와 페루인들이 왜 가난하게 살아가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 다이아몬드 이론에 따르면 잉카제국 사람들이 모든 식물과 동물종을 기를 수 있고 스스로 개발하지 못한 기술을 습득했더라면 에스파냐의 생활수준을 빠르게 따라잡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장 - 제레드 다이아몬드 이론의 한계 中]

본래 사회과학적 설명은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구별하기 쉽지가 않다. 실제 우리가 관측하는 역사적 결과는 복잡한 현상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과성이 옳은 관계라 하더라도 (예컨대 "학력은 생산성을 높인다") 실제로는 그런 결과가 거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은 높다. (학력이라는 설명변수에 영향을 미치는 외생변수들)

그런 한에서 저자들이 여러 불평등 이론의 한계와 비판점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도 조심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동기를 부여하는 인센티브 제도가 나라간 불평등 차이를 만든다

좋다. 그렇다면 저자들이 말하는 "제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이에 대한 핵심적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나라마다 경제적 성패가 갈리는 이유는 제도와 경제 운용에 영향을 주는 규칙,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인센티브가 다르기 때문이다.
[3장 - 착취적 경제제도 vs. 포용적 경제제도 中]

즉 이들이 말하는 제도란 생산성을 높이는 경제활동(생산, 투자 등)에 집중하여 결실을 그만큼 분배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의 여부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사유재산권의 보장"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제도가 적용되는 제도를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inclusive political/economic institutions"라고 특별하게 칭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경우를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extractive political/economic institutions"라고 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착취exploit라는 단어에 비교해보면 이쪽은 폭압적인 강탈, 약탈에 가까운 의미로 들려서 "약탈"이라는 번역이 어땠을까 싶다.

다원주의와 포용적 경제제도

또한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에 있어 포용이란 결국 다양한 것을 포괄하고 포함하려 노력하는 정치적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때문에 다원주의는 포용성과 관계가 큰 개념일 것이다. 보통 가난하고 독재가 오랜기간 이루어진 가난한 나라들은 포용성도 떨어지고 다원성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포용적 "경제" 제도에 있어 다원주의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과 미국이 포용적 경제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다원적 정치제도뿐 아니라 중앙집권체제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이 점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나라가 발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다. (...) 소말리아의 제도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어 실제로 누군가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 이런 혼란의 근본적인 이유는 소말리아에 정치의 중앙집중화 또는 중앙집권체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 기본적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장 - 착취적 정치제도 vs. 포용적 정치제도 中]

어찌보면 갸우뚱 하게 만드는 말이다. 다원적인 정치제도는 중앙집권체제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말 말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소리일 수 있다. 다원성을 인정하면서 질서 있고 중재가 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사례를 보면 강력한 중앙권이 없으면 다원주의는 혼돈과 혼란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부족간 내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나라가 이런 갈등을 중재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애초부터 국가는 근본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얻기 위한 유인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말리아의 사례는 결국 국가형성의 실패한 (그리 드물지 않은) 형태라 봐야 하지않나 싶다.

가만 내버려둔다고 해서 정치제도가 다원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중앙집권화 역시 자연 발생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느 사회든 중앙집권적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인센티브가 있기 마련이다. (...) 중앙집권화의 가장 큰 장벽은 (...)  그런 반대 세력과 폭력적 대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중앙집권화를 꿈꾸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3장 - 왜 늘 번영을 선택하지 않는다 中]

따라서 이 사례는 다원성이 재앙이 되어버리는 국가의 실패에 대한 독특한 사례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착취적 경제제도와 콩고의 사례

유명한 방송인 조나단의 고향으로 알려진 콩고의 사례는 약탈적 성격을 확인하는데 다른 착취적 사례들보다 더 특이하고 악랄하다. 특히 레오폴드 2세 하의 벨기에가 고무와 노예시장을 위해 콩고 민중에 자행한 악행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일 것이다. 어찌보면 벨기에가 콩고에 미친 영향으로 아직까지 가난한 경제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콩고인 1000만 학살 … 벨기에의 흑역사 | 중앙일보

박준형이 벨기에에서 인종차별과 폭행을 당한 사건이 온라인에서 크게 화제가 되면서 벨기에의 과거 인종차별 사례와 잔혹한 식민지 수탈의 '흑역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www.joongang.co.kr

어쨌든 여기서 착취적 경제제도의 특성이 잘 설명되어 인용해본다.

콩고가 이처럼 극도로 가난하고, 콩고 농민이 더 나은 기술을 접하고도 수용하길 꺼렸던 이유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경제제도가 착취적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
더 잘 살려면 콩고 사람은 저축과 투자를 해야 했다. 가령 쟁기를 샀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더 나은 기술을 사용해 쥐꼬리만큼의 잉여 생산분이라도 있었따면 왕과 엘리트층이 죄다 빼앗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3장 - 콩고의 오랜 시련 中]

예컨대 중세의 농노제 하에서 농노가 생산성 혁신에 몰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이미 발전된 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중세를 잘못 바라보는 것일 수 있다. 즉 결과론일 뿐이지 그 당시의 구조에서 경제만 쓰윽 하고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컨대 코헨(국역판:p389)[각주:3]에 따르면 그 당시의 경제구조는 생산력의 족쇄가 되기도 하지만 그 특정 구조가 그 제도가 가능한 생산력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다고 본다. 예컨대 영주는 성을 쌓아 농노를 보호해주고 그에 가능한 생산력을 성이 없을 때 생산성보다 더 큰 생산성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착취적 정치제도에서의 경제성장

이제는 착취적 "정치" 제도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질문을 해보자. 위에서 내가 든 농노제 하에서 생산력을 그 당시 가능한 생산력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 질문을 비틀어보자는 것이다. 즉 착취적 제도 하에서도 경제성장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유효하게 저자들의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 말이다.

저자들은 착취적 제도 하에서도 경제성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성장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1) 엘리트층의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
2) 생산성이 높은 활동에 자원을 분배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박정희 정부로 들 수 있다. 군사독재시절 기업인들의 조인트를 까면서 투자를 어디다 해라 명령을 내리던 시절이다. 이런 방식이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남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통 독재로 다스린 나라의 귀결은 대부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남한은 특이한 사례라 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 하에서의 그런 국가중심의 경제 개입이 장기적으로 성공적일 리는 없을 것이다. 5개년 경제계획이니 뭐니 이런 모델은 애초부터 소련에서 유래한 모델이고 이 모델들은 보통 초기에는 효과가 좋았지만 장기적으로 무너지기 쉽상이었기 때문이다.

착취적 제도 하에서 그런대로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며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는 본격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 (...) 1970년대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성장은 멈추고 만다. (...) 창조적 파괴와 광범위한 기술혁신이 수반되지 않는 성장은 지속될 수 없으므로 급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다.
[3장 - 착취적 정치제도하의 성장 中]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엘리트층의 통제"란 무엇 때문에 언급한 것일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국가가 경제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착취적 제도 때문이다. (...) 그런 제도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사회의 나머지 대다수를 희생시켜가며 권력을 영구히 유지하려는 엘리트층이 도사리고 있다.
[13장 - 실패한 국가의 공통점 中]

즉 엘리트층이 자신의 권력과 자산을 중심으로 지대추구를 하고 이것이 제도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고정된 경우가 가장 극단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결론

책을 읽으면서 포용적 제도라는 개념보다 착취적 제도라는 개념이 너무 크고 다층적인 개념이 없다고 생각했다. 시장경제나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와 다른 모든 것을 "착취적"이라 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때로는 로마시대까지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데 꽤나 불만스러운 사용이 아닐까 싶다. 저자들은 이 두 개념을 서로 다른 분리된 개념으로 사고하지만,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의 사례로 보는 잘사는 나라들의 그 결과는 사실 마르크스가 설명했던 "이른바 시초축적"[각주:4]이 필수적인 것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저자들은 잉글랜드의 명예혁명과 같은 역사적 우발성을 인정하는 말을 단서적으로 달았지만 말이다.

  1. Acemoglu, D., & Robinson, J. A. (2012). Why nations fail. New York Review of Books, 59(13), 85-86. 국역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역. 장경덕 감수. 시공사. 2012년 발행. 전자책. [본문으로]
  2. Jared (Jared Mason) Diamond. (2005). 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 Viking Penguin. 국역본. 문명의 붕괴. 2005년 발행. [본문으로]
  3. Cohen. G. A. "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ce." Oxford: Clarendon Press, 1981. (국역판)"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역사유물론 옹호." 박형신, 정헌주 옮김. 한길사. 2011. [본문으로]
  4. Marx, Capital vol. 3, (Penguin, 1981) 571. 링크 https://climateandcapitalism.com/2022/09/05/so-called-primitive-accumulation/ 에서 참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