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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주체란 무엇인가」 노트

현정경 2025. 12. 26. 20:48

「주체란 무엇인가」[각주:1]

주체란 무엇인가 책 표지

한 줄 요약

이로서 주체적인 것이란 객체화와 주체화를 통과하여 균형을 갖고 투쟁하며 불평등한 조건을 가로질러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사유하고 창조해내는 것이다

일러두기

  • 이 글의 소제목은 책의 [장>절]로 표기했다. (예:1.술어적 주체를 넘어>주체와 술어)
  • 전자책이기 때문에 페이지번호가 없으므로 해당 장과 절인 소제목으로 표기를 갈음한다.
  • 인용 시 중략할 경우 (전략), (중략), (후략)으로 표기한다.
  • 인용문에 인용자가 주석을 달 경우 대괄호[] 안에 @현정경:으로 표기한다. ( 예:이것[@현정경:그것] )
  • 저자가 굵은글씨로 강조한 경우에는 인용 시 동일하게 표기하지 않았다.

1장. 술어적 주체를 넘어>주체와 술어

내가 “나는…”이라고 언표할 때, 즉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가 일치할 때 한 주체의 “자기의식”이 성립한다.

자기의식에 대한 명쾌한 정의라 인용해보았다.

1장. 술어적 주체를 넘어>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

시간이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이라는 것이 단지 주체가 시간 속에서 변해 간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중략)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은 주체를 역설적으로 조건짓는다. (중략) 시간적 지평 위에서 주체는 변화를 겪는다. (중략) 그래서 주체는 근본적으로 이율배반적인 존재, 그러나 불연속적인 모순 구조가 아니라 연속적인 시차적視差的 구조를 띤 존재이다. 이 시차적 구조가 주체의 삶을 상반된 두 힘이 투쟁해 가는 장으로 만들며, 술어적 주체란 이런 과정의 어느 한 면을 잘라 보았을 때 성립할 뿐이다.

주체는 어떤 변치않는 것이 아니라 시간속에서 변해가는 어떤 것으로 저자는 사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방법론은 헤겔에게서 특히 명징하게 다가오는 것이라 친근하기도 하다.

2장. 차생(差生)과 정체성>자기차이성

주체가 시간의 지평 위에서 되어-가는 과정은 그 주체의 경험에 기반한다. 주체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으로 되어-간다.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경험을 통해서 자신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경험이란 우선은 겪음이다. 주체는 살아가는 한 끝없이 겪음(’파토스’)에 처한다.

주체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되다”를 통해 되어-간다. 여기서 무엇을 겪는가는 일단 현재로서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2장. 차생(差生)과 정체성>고유명사로서의 주체

철수가 총각이라는 것은 곧 그가 결혼하지 않은 남성임을 뜻한다. 이것은 분석명제이다. 하지만 철수가 서울에 산다는 건 종합명제이다. 경험을 통해 확인해야 할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게 모든 명제는 분석명제다. 종합명제라고 일컬어지는 명제들은 다만 무한한 분석을 요하는 명제들일 뿐이다. (중략) 베르그송은 전통적인 철학들이 대개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대전제 위에서 움직였음을 종종 지적한 바 있다. 이때의 ‘모든 것’은 각 철학자들마다 다르다.

이런 주체[@현정경:사건들의 총체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주체]는 어떤 집합체의 요소이기를 그친다. 가로지르는 주체는 어떤 면에 속하는 점이 아니라 운동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중략) 한 사람의 주체성은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이런 운동이 결과적으로 만들어 가는 고유한 어떤 길일 것이다.(주석 中)

저자에게 갖는 어떤 의문은 이렇듯 친근한 설명을 통해 간혹 “개인” 그리고 “자아”라는 관점으로 “주체”와 혼란스럽게 섞인다는 점이다. 저자는 상당히 주체를 확장 가능하게 설명하는 부분인데 이런 설명은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주체는 현재 살아가는 “자아”를 갖고 경험하는 지금의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조주의자”가 아닐까 놀랍기도 한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정체성은 주체의 규정성들의 집합론적 고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간의 종합을 통한 주체의 고유한 계열화를 통해 성립하며, 이 종합의 고유성이 한 주체를 술어적 주체를 넘어서는 고유명사로 만들어준다. 자유는, 그것이 자기에 대한 착각이 아닌 경우, 이렇게 객체성에 여건을 두고 이루어지지만 또한 시간 속에서 고유하게 성립하는 주체성에 뿌리 두고 있다.

2장. 차생(差生)과 정체성>객체성과 주체성의 갈등과 화해

(전략) 이런 순환성을 망각할 때 즉 인식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뫼비우스적-역동적 이율배반을 인식하지 못할 때, 자신이 얻은 인식 결과를 다시 자신에게 투영해 자신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우愚를 범하게 된다. 앞의 인식론적 우[@현정경:인식대상은 인식주체의 선험적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실재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와 짝을 이루는 이 우를 통해서 주체는 사실상 자신이 만들 것일 뿐인 그물로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기이한 모순을 범하게 된다.

여기서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은 책에서 명확히 설명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관련있는 것은 “객체성과 주체성은 공간적으로 주어진 구조가 아니라 시간속에서 계속 밀고 당기면서 변형되어 가는, 즉 이율배반의 구체적 형태 자체가 계속 변해가는 탈구조적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정도이다. 즉 객체성과 주체성이 서로를 규정할 때 다시 말해 객체적 존재가 타자를 객체로, 주체적 존재가 타자를 주체로 규정하는 모순적인 경우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했다.

인식이란 주체와 대상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주체와 주체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주체와 주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코드를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이다. 인식이란 대상이라는 타자성과의 부딪침만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부딪침을 함축한다. 이런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여러 가지 형태의 인식론적 아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3장. 인식론적 역운

술어적 주체를 넘어 주체-되기를 행할 때, 계속 변이해 가는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의 선상에서 성숙해 가는 주체-되기를 행할 때, 핵심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인식이다. 생성하면서 성숙해가는 주체는 겪음으로써 성숙해가는(”pathei mathos”) 주체이며, 이 겪음에 있어 중요한 한 양상은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4장. 타자-되기>거대 주체를 무너뜨리기

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만큼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자를 객체화하는 만큼 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객체화되는 것, 이러한 주체화와 자기객체화 사이에 균형이 무너질 때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게 된다.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균형 속에서만 주체화와 객체화를 둘러싼 갈등도 균형을 잡는다.

여기서 재밌던 것은 ‘주체화’는 매우 친숙한 개념인데, ‘객체화’는 상당히 친숙하지 않은 개념이라는 점이다. 사실 객체화는 우리가 매우 자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들은 사실 음흉하다”, “저런 행동을 할만한 저들은 분명 XX일 것이다”와 같이 자유로운 주체인 타자를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주체화”라는 쉽게 목표로 설정하기 쉬운 것에 비해 객체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가볍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절이 “거대 주체 무너뜨리기”라는 점은 적절한 타겟일 듯 하다.

객체화와 주체화의 균형을 위해 때로 자발적인 객체화가 요청된다. 모든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서(예컨대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릴 때) 스스로를 참을성 있게 객체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처음부터 소수의 커다란 주체들과 대다수의 작은 주체들이 대립하는 현실에서, 균형이란 주체성과 객체성의 단순한 배분이 아니라 이미 높이 솟아 있는 거대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데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투쟁의 삶이고, 그늘을 만들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소요의 삶이다.

저자는 주체성과 객체성이 문제로 비대칭한 구조를 염두하고 있다. 이런 한에서 정치철학적 주체 설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인식론적 문제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접근이라 해야 할까?

4장. 타자-되기>타자-되기

타자-되기란 결국 “우리”-되기ㅡ우리에 갇힌 ‘우리’가 아니라 이-것으로서의 우리ㅡ이다. 되기란 관계 속에 들어감이며, 사이에서 자신과 타자의 동시적인 변이를 꾀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동적-뫼비우스적 이율배반의 선상에서 생성하는, 이중체로서의 ‘sub-jectum’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 선상을 따라가면서 숱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것들로서의 ‘우리’들을 살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5장. 무위인(無位人)>상생적인 되기의 함정:남북한의 예

두 주체가 적대하지 않고 나란히 병치될 때 공존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경우 역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지만, 이때의 균형이란 객체화의 힘이 상쇄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객체화의 힘이 동시적으로 맞물려 있음으로서 성립한다.

자기 객체화의 힘이 동시적으로 맞물리는 이 케이스에 대해 저자는 남북한의 예시를 들고 있다. 즉 “북한은 남한을, 남한은 북한을 객체화했으며 각자의 주체성을 상대방에게 투영해 서로에 대한 허상을 만들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6.15 공동선언 사건이 “통일을 희구하는 한 맺힌 사람들의 감정”으로 “한 주체”(민족)로 합쳐졌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상당히 동의가 안가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 것은 같다. 객체화에 균열을 내면서도 객체화의 힘이 동시에 맞물리는 저자와 다른 케이스를 생각해보았다. 한 쇼츠에서 본 영상 이야기이다. 그 영상은 두 다리가 없는 청년 두 사람이 나오고 한 사람이 “두 다리가 없는 게 나아? 한쪽 팔이 없는게 나아?”라고 상대방에게 묻는 거다. 그랬떠니 "두 다리가 없는 것"이라며 두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한쪽 팔이 없는 청년을 놀리는데, 그 한쪽 팔이 없는 청년은 두 청년에게 뻐큐를 날려주는 영상이다. 이런 케이스는 뭔가 서로 잘못된 행동이긴 하지만 객체화의 힘이 상쇄되는 지점이자 어떤 균열이자 장애라는 차원에서 자유로우며 해방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가?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서로를 “니거”라고 놀릴 수 있는 예시를 생각해보자. 한 쇼츠에서 흑인들이 노예에서 막 해방된 시점에 "백인에게서 니거란 단어를 빼앗아내자"는 가상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면 끄덕여진다.

5장. 무위인(無位人)>진정한 우리-되기의 가능근거:무위인

사회의 집합론적 구조, 존재론적으론 생명의 배반인 죽음을 또 가치론적으론 불평등을 함축하는 이런 구조를 ‘위’位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위인이란 이런 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이-것들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이-것들의 창조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학적 행위기도 하다. (중략) 숱한 위의 형태들이 점선들로 존재하는 허虛이다. 무위인이란 이 허의 차원으로 내려가 삶의 또 다른 방식들을 사유하고 현실로 다시 올라와 새로운 이-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그때에만 무위인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며, ‘우리-되기’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

결론

구조주의적 주체관에 더 익숙한 나로서는 이런 설명 방식은 꽤나 신선했다. 나는 철학 비전공자이니 잘 알 리가 있나. 정리하자면 어떤 현실적 조건과도 상관없이 자유롭게 행위하는 것이 무위인이 아니다. 세속과 거리를 두며 도시 속에 살아가는 자유로운 도사를 상상해보자. 허나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 조건들과 배경과 제약들을 "가로지르기"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무위인이다. 그런데 독특한 건 저자가 가로지르기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이 독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 가로지르기도 창조도 모두 고통스러운 과정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

  1. 이정우. (2018). 「주체란 무엇인가: 무위인에 관하여.」그린비. 2018-06-21 발행. 전자책(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18828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