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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각주:1]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책 표지

한 줄 요약

현존재는 근원적으로 마음씀에 의해 구성되며 그 마음씀 때마다 자기 자신을 앞질러 있다. 항상 현존재는 일정한 가능성을 향해 기투한다.

일러두기

  • 이 글의 소제목은 내가 임의로 정한 것이다.
  • 이 책의 목차에 “부, 편, 장, 절은 강독의 성격에 맞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 전자책이기 때문에 페이지번호가 없으므로 소속되어 있는 예를 들어 서론 1장 1절을 (서-1-1)로, 1부 1편 1장 1절과 같은 경우엔 (1-1-1-1)로 표기했다.
  • 이 책은 절을 예를 들어 1절을 §1 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1절로 바꿔 표기할 것이다.
  • 인용 시 중략할 경우 (전략), (중략), (후략)으로 표기한다.
  • 인용문에 인용자가 주석을 달 경우 대괄호[] 안에 @현정경:으로 표기한다. ( 예:이것[@현정경:그것] )
  • 인용문에서 외국어 병기 시 외국어를 무시한다. 다만 병기가 불가피하면 병기했다.
  • 저자가 굵은글씨로 강조했더라도 인용 시에는 무시했다.

시작하며

내가 하이데거를 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어이없게도 게임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마키세 크리스가 쿄우마에게 하이데거의 언급을 인용한 덕분이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시간적 존재이다.

이 말에 끌렸다고나 할까? 아시는 분은 알테지만 나는 현상학이나 실존주의와 같은 분야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어쨌든 게임 덕에 “언젠가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나서 거의 10년은 지나서 시작하는 것 같네ㅎㅎ 아무튼 시작해보겠다.

이 책은 무슨 책인가

이 책은 책 이름처럼 말그대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독해하며 내용들을 해설하는 책이다.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하고자 한다. “존재”를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해 다른 차원을 언급해두겠다. 그것은 실존주의적 원칙이다. 이를 설명하자면 예컨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명제를 보자. 여기서 그 존재가 생각하지 전에, 생각하는 존재가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존재”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나의 경우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의 출발점이 되려면, 말의 순서를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로 바꿔야 한다. (1-1-6-43)

존재물음과 존재이해에 대한 설명

앞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를 “존재물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음을 행하는 것에는 일정한 “이해”가 필요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하이데거는 다음의 세 가지 구조계기를 갖는다고 언급한다.

모든 물음은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과 ‘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 그리고 ‘물음이 걸리는 것’을 갖는다. (중략)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에서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은 존재의 의미이고, ‘물음이 걸리는 것’은 우리 인간인 현존재라고 말하고 있다.(서-1-1)

이때 ‘물음이 걸리는 것’이 현존재인 이유는 존재자의 존재가 존재인 한에서 존재물음은 그 존재가 물음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존재물음에서 걸리는 것은 존재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존재자는 “어떤 존재자”로 출발하는 것이 좋은가?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이 이러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서-1-2)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본능과 욕구 외에도 “독자적인 존재방식”(서-1-2)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한 존재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를 “존재이해”(서-1-3)라 하며 “인간은 존재이해를 갖는다”(서-1-3)고 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라면, 이 존재이해가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바로 “현존재의 존재구조”(서-1-3)를 파악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전략) 하이데거는 현존재에게 주어지는 존재이해를 개시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게시성 내에서만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자들과 관계하고 그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구조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게시성이 어떻게 주어지고 어떠한 구조를 갖는지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서-1-3)

현존재의 실존 그리고 기투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갖는 독특한 존재방식을 실존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존이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뇌하는 존재인 것이다. (서-1-4)

여기서 자기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갈 수 있다. 이에 대한 세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현존재는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투하고(entwerfen) 그러한 기투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우 문제가 되고 있는 현존재는 보편적인 인간 일반이 아니라 각자적인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이다. 현존재가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투한다는 것은 자신이 구현해야할 가능성을 ‘기획하면서 내던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1-4)

여기서 “기투”라는 말이 생소할 수 있겠으나 독어 entwerfen은 “내던져짐”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즉 각자의 존재들이 “세계에 내던져졌다”는 수동적인 의미와 함께 삶의 가능성을 기획하고 구현한다는 능동적인 의미가 포함되는 뜻에서 “기투”라고 번역한듯 하다.

여기서 기투는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는 것으로부터 제기되는 물음”(서-1-4)이며 이를 실존성이라고 하이데거는 언급하고 있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한다.

현존재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물이 컵 안에 있거나 옷이 장롱 안에 있는 방식으로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략) 독일어 in(내)은 innan에서 유래하며 ‘어디에 산다’, ‘거주한다’, ‘머무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innan의 an은 ‘익숙하다, 친숙하다’, ‘어떤 것을 돌보다’를 의미한다. 아울러 ‘내가 있다’를 의미하는 독일어 ‘ich bin’에서 bin은 bei(곁에)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에 몰입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Ich bin in der Welt)는 것은 현존재가 ‘친숙한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에 몰입해 있는 채로 거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1-2-12)

그러므로 세계 내 존재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세계-곁에-있음(Ich bin bei der Welt)에 대응되는 것이다. 이를 더 풀어서 말하면 “현존재가 ‘친숙한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에 몰입해 있는 채로 거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1-2-12) 그래서 돌맹이 같은 무기물적인 존재자는 세걔 안에 존재하지만 다른 존재자들에 몰두하거나 관계 맺지 않기 때문에 세계-내-존재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내-존재라는 용어에서 하이픈은 현존재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 문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1-2-12)

현존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여기서 현존재가 대체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각각의 우리 자신”(1-1-4-25)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현존재는 각각의 나 자신인 존재자이며 그 존재는 각각의 나의 존재이다. 그런데 이 나는 보통 주체로서, 즉 태도들이나 체험들이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일한 것으로서 자기를 유지하는 자로서 이해된다. 우리는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눈 앞의 사물, 탁월한 의미에서 ‘근저에 놓여 있는 것’, 즉 기체 내지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1-1-4-25)

세계-내-존재의 본질적인 마음씀

즉 현존재의 존재란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에 몰입한 채로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면서 자신을 앞질러 있음’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체적인 구조를 가리켜 마음씀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략) 세계-내-존재는 본질적으로 마음씀(Sorge)이기 때문에, 앞에서 행해진 분석에서 도구에 ‘몰입해 있음’은 고려(Besorge)로서, 그리고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타인들과 ‘함께 있음’, 즉 공동존재는 배려(Fürsorge)로서 파악될 수 있었다. (1-1-6-41)

시간성을 갖는 현존재

이제까지의 분석들은 모두 현존재의 존재를 마음씀으로 규정하였다. 헌데 일상성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존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존재는 죽음의 순간에만 온전히 전체가 된다”(1부2편45절)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분석은 죽음을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전체를 분석했다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현존재란 죽음을 향한 존재이자 “본래적으로 전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1-2-1-4)이 제시되어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의 존재를 위한 궁극적인 본질을 시간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전략) 현존재는 시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현존재는 항상 장래를 향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고 이러한 가능성의 빛 아래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면서 현재의 상홍을 개시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존재자들은 이러한 시간적인 존재자로서의 현졵에게 개시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도 모두 시간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서-2-6)

현존재의 죽음이란 무엇일까? “더 이상 현존재로 존재할 수 없다”(1-2-1-49)는 가능성이다. 이는 현존재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투하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는 죽음의 가능성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로 즉음이란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이다.(1-2-1-49)

현존재의 존재에 죽음을 향한 본래적 또는 비본래적 존재가 속한다면, 이러한 존재는 현존재가 장래적 존재이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여기서 장래란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곧 있게 될 지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면서 자기에게 도래하게 되는 그 ‘옴’(來)을 가리킨다. 죽음으로서의 선구는 현존재로 하여금 본래적으로 장래적으로 존재하게 하지만, 그러한 선구 자체가 가능한 것은 오직 현존재가 ‘존재하는 자로서’ 이미 항상 자신에게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장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1-2-3-65)

장래라는 의미는 아직 와닿지 않을 지 모르나 뒤이어 설명된 부분을 인용해보는 것도 이해를 위해 나쁘지 않다.

장래, 기재, 현재는 ‘자기를 향해’, ‘…..으로 돌아와’, ‘……을 만나게 함’의 현상적 성격들을 가리킨다. (1-2-3-65)

여기서 기재(旣在, Gewesen)란 사전적으로 “이미 있음”이란 뜻이다. 또 장래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란 내 생각에는 전체로서의 도래할 자신을 “현전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더 정확히 하이데거의 설명에 의하면 “기재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로써의 현존재라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장래적으로 자기로 되돌아오고 존재자를 현전화하면서 결의성은 상황 속에 진입한다. 기재는 장래에서 발원하고 이러한 기재적인 장래가 현재를 자신으로부터 방출한다. 이렇게 ‘기재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라는 통일적 현상을 하이데거는 시간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존재가 시간성으로서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만 선구적 결의성이라는 ‘본래적으로 전체로서 존재함’이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성은 본래적 마음씀의 의미로서 드러난다. (1-2-3-65)

따라서 현존재의 “근원적 통일성은 시간성에 있다”(1-2-3-66)

지금까지 설명해온 “시간성”을 보면 우리가 “현존재가 시간적으로 존재한다”(1-2-5-72)고 말할 때 시간이 지나며 자신을 통과하며 사라지는 “지금”이라는 의미 그리고 도래할 먼 발치의 미래시점의 존재가 아니라 그 전체(죽음)로서의 존재가 기재하면서 현전화되는 것으로서 시간성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 : 왜 시간성이란 개념으로 존재론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했는가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어째서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이렇게 복잡해보이는 방식으로 개념화하였는가. 기재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로서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현존재라는 이 개념 말이다.

일단 그의 개념에서 “현존재”란 다음과 같다.

  • 장래적 특성 : 도래할 죽음이라는 궁극적 가능성을 앞지른다.
  • 기재적 특성 :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과 환경들이 주어진 상태로 세계로 내던져진다.
  • 현전화 특성 : 세계-내-존재로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로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시간적으로 통일된 것으로 파악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전통철학의 인식론과 질료-대상, 오성과 관련한 여러 썰들을 떠올려볼 때 항상 인식론들이 “지금” 세상 혹은 사물을 관찰하고 있는 현재의 “나”라는 개념에 의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나 하이데거 스스로도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근대적 인식론을 상당히 자주 다루고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개념을 통해 존재론을 시간적으로 통일된 어떤 것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 보인다.

PS : 별로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언급은 해야겠다. 중간에 “양심론”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을 진지하게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히틀러에 협조했던 사실이 자꾸 떠올라 비웃겨서 집중이 안되었기 때문.

-끝-

  1. 박찬국. (2019).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9-04-26 발행. 전자책(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18829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