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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마르크스 주의 연구 제 14권 제 1호에 실린 이채언 선생님(이하 이채언)의 「수리 마르크스 경제학」 서평[각주:1]을 보았다. 그의 글은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전통적으로 발전되어온 선형생산모형에 대한 비판점이 간단히 요약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르크스경제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준이 있다고 먼저 설명한다.

(1) 가치량은 사회적 실체를 포함해야 한다.

(2) 가치 모형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3) 고정자본의 가치는 생산능력과 그것의 노쇠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공준들을 천천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3)에 대해서는 이채언 역시 서평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서술이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량은 사회적 실체를 포함해야 한다

선형생산모형의 가치방정식 $\lambda=\lambda{A}+l$은 $n$ 개의 상품에 대한 가치양을 벡터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임의의 $i$로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상품의 가치는 $\lambda_{i}=\lambda_{1}a_{i1}+...+\lambda_{n}a_{in}+l_{i}$로 표현될 수 있다. 여기서 상품 $i$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i$를 제외한 상품들의 수열 $\lambda_{1}a_{i1},...,\lambda_{n}a_{in}$은 정확히 투입-산출 연관 관계를 나타내며 따라서 노동량은 생산된 상품들에 투하된 노동들이 각 생산방법들이 연관되게 되기 때문에, 모리시마(1977)[각주:2]는 이를 가치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각주:3] 하지만 이채언에게 있어 상품생산에 필요한 수열 $\lambda_{1}a_{i1},...,\lambda_{n}a_{in}$에서 배분되는 노동량 $l$이 사회적 양인지 투하된 노동량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류동민의 저서 내에서도 이미 검토되고 있다.

플리트우드(Fleetwood, 2001)는 경제현상의 수학적 재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잘못임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한 논점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으로 초점을 좁혀보면 노동벡터(l)가 마르크스적 의미의 추상노동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l의 원소들은 시계로 잰 노동시간인가, 아니면 숙련노동의 미숙련노동(또는 이질노동의 동질노동)으로의 환원을 거친 노동인가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사실 이것을 리피에츠(Lipietz, 1982)처럼 "착취텐서"(tensor of exploitation)라는 개념을 도입하거나 노동가치론을 포기하더라도 보울스와 긴티스(Bowles & Gintis, 1988)처럼 노동력으로부터 노동의 추출과정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또 다른 이론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도 가능하다. 물론 플리트우드 류의 비판에서는 그러한 시도들이 여전히 재현하지 못하는 실재를 남긴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각주:4]

어쨌든 $l$이 사회적 실체를 갖는 것을 보이려면 노동의 동질화 과정을 나타내야 한다고 이채언은 지적하고 있다. (즉 위의 플리트우드의 지적과 일맥상통하는 해결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선형생산모형에 중대한 문제는 아닌데, 왜냐하면 $l$은 이미 동질화를 거친 동질노동이라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질적인 노동을 동질화하는 일명 "환원" 과정에 대해서는 또 다른 분석모형이 존재하고 시도된 연구들이 많다. (Okishio(1963)[각주:5], Krause(1982)[각주:6], 中谷, 武. (1981)[각주:7] 등 자세한 것은 이 블로그의 태그 [환원문제]를 참고할 것)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이채언의 언급은 $l$의 동질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는 정도의 의미로 보인다.[각주:8] 물론 류동민의 책에서 노동의 돌질화는 테크니컬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이질적 노동들이 동질화되는 과정의 수리적 서술이랄까) 이 부분에 대한 경제이론적 보충은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가치 모형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이채언의 또 다른 관심은 선형생산모형들이 물리적 양이라는 공리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투입계수행렬의 원소들이 서로 물리적 단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회적 관계를 보이는 데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도 읽힌다[각주:9]. 물론 선형생산모형은 물리적 단위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르크스경제이론이 밝히는 사회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재현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충분히 지적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선형생산모형의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다.

단지 한 가지 부당한 지점이 있다. 이채언은 여기서 투입계수행렬에 가치가 곱해진 $\lambda{A}$에 대해 다음의 식이 타당함을 보이려고 한다는 점이다. 즉

(1) $\lambda_{t+1}=\lambda_{t}A_{t+1}$

일반적으로는

(2) $\lambda_{t+1}=\lambda_{t+1}A_{t+1}$

이다. 이채언은 (1) 모형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각주:10]. 아시다시피 (1)로 방식을 바꾸게 되면 선형생산모형이 시점간 모형으로 바뀌게 된다. 즉 이채언은 시점간 단일체계를 견지하는 자신의 방식을 언급하려고 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기술적 검토를 먼저 해보자. 우리가 초기값 $\lambda_{0}$과 투입계수행렬이 주어졌다면 임의의 시점 $n$의 가치량은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lambda_{n}=\lambda_{0}A^{n}+l+lA+lA^{2}+...+lA^{n}$

이때 $n$이 무한으로 가면 (2)식과 같은 모형과 일치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시점간 단일체계를 선형생산모형으로 표현하게 되면 투입계수행렬의 무한등비수열의 성격 상 ($l(I-A)^{-1}=l+lA+lA^{2}+....$) 둘은 차이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시점간 단일체계가 시점 모델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어진다. 즉 현재의 가치는 과거의 정보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채언은 류동민의 책에서 상당부분 시점간 단일체계에 대한 비판들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결론

물론 선형생산모형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문제도 많이 밝혀졌고 한계점도 충분히 논의되어 왔다. 따라서 현재로서 나는 이것이 교육용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선형생산모형은 일종의 소통창구, 소통도구의 의미로서도 훌륭한 기능을 갖추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도 말한 바 시점간 단일체계가 선형생산모형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의 경제이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채언의 서평에서 선형생산모형의 비판들은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알리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이채언. "역사유물론과 [수리마르크스경제학]." 마르크스주의 연구 14.1 (2017): pp233-243. [본문으로]
  2. Morishima, Michio. Marx's economics: a dual theory of value and growth. CUP Archive, 1977. (국역본)"맑스의 경제학 : 가치와 성장의 이중이론". 류동민 역. 나남. (2010) [본문으로]
  3. Morishima, Michio. 1977. ibid. (국역본)p36. [본문으로]
  4. 류동민. "수리 마르크스 경제학.". p36. 충남대학교 출판문화원(2016) [본문으로]
  5. Okisio, N. (1963). A mathematical note on Marxian theorems.Weltwirtschaftliches Archiv, 287-299. [본문으로]
  6. Krause, U. (1982). Money and abstract labour. NLB/Verso. [본문으로]
  7. 中谷, 武. (1981). 異質労働とマルクスの基本h定理. 囯民経済雑誌. 143(5) : p87-95. [본문으로]
  8. 이채언. (2017). op. cit. pp236. [본문으로]
  9. 이채언. (2017). ibid.. pp237. [본문으로]
  10. 이채언. (2017). ibid.. pp238~23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