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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로드릭(2015)에 따르면 (주류)경제학은 이론이라는 표현보다는 다양한 모델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각주:1] 물론 주류는 '한계주의 혁명'을 자신들의 학설사적 원천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한계효용이론이 그들의 이론이라 볼 수 있다. 이 한계효용이론은 주관적 효용가치이론으로 구분되는데[각주:2]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을 규명하는 이론은 현실분석에서 특정한 조건을 조망하는 발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라고 로드릭은 주장한다.[각주:3]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특정한 조건에서 연역하는 체계인 수리적 모델(들)일 것이다.

경제학은 하나의 모델 대신 여러 종류의 많은 모델들을 포괄한다. (....) 경제학에서 모델의 다양성은 세상사의 유연함에 대응하는 필연적인 것이다. 사회적 환경이 다르면 그 모델도 달라져야 한다.[각주:4]

실제로 모델링을 하는 연구자들은 효용가치이론에 일관적인지 여부에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구체적인 어떤 경제적 현상은 그에 맞는 특정한 조건의 모델이 필요하고 적절한 모델을 선택한다고 보는 태도와 같다. 예컨대 독과점 현상을 두고 왈라스체계를 교조적으로 앞세우며 독과점 현상을 부정하려는 경제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로드릭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은 실제 현실분석 차원에서 한계효용이론과의 일관성보다는 그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그에 맞는 모델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경제학은 이론과 모델 모두 활발한 논의가 이어져오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이 모델을 사용하는 (주류든 비-주류경제학이든) 경제학계의 분위기와 다르게 형성되는 어떤 분위기가 있다. 바로 이론과 모델 연구자 사이에 형성되는 갈등 혹은 긴장관계이다. 예를 들자면 이론 연구자가 모델 연구자에게 "그것은 마르크스적이지 않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모델 연구자가 이론 연구자에게 "문헌적 근거로 정합성을 판별할 수는 없다"고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 긴장관계는 둘 간에 어떤 오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의 이해가 좁혀지지않고 지속되어온 것 같다.

그런데 모델 연구자라고 해서 이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역시 문헌적 근거를 통해 모델링을 한다.[각주:5] 그럼에도 보편적인 사회법칙을 말하는 이론에서의 조건들을 현실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모두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특정한 가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론 이론 연구자들은 수학적 모델링에 대해 물신주의로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뒤메닐의 이윤율 모델에 대해 자본물신성이라고 비판[각주:6]한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이 말은 모델 연구의 목적을 잘못 오해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덕민(2015)[각주:7]은 여기서 이윤율 모델이 다양함을 말하는데 그의 말은 사실이다. 뒤메닐&레비(1993)[각주:8] 역시 다양한 이윤율 모델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는 모습을 보인다. 뒤메닐&레비의 모델이 마르크스의 정의와 다르다는 지적[각주:9]은 분명 정당하다. 하지만 현실분석 차원에 들어가면 그 지적은 정당하지 않다. 이론은 항상 보편타당한 법칙이지만 일종의 본질적인 부분만을 남기고 추상화한 것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실은 그 복잡하기 때문에 추상성을 낮춰야 할 일이 생기면 사실 이론은 거의 쓸모가 없다. 김성구(2015)의 지적은 현실분석 차원에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정의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현실을 잘 설명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정의를 살리려는 것보다)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글에서는 모델 연구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론/모델 연구자들 모두가 이론과 모델을 교조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함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할 것이다. 먼저 이론과 모델이 추구하는 목적의 차이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론과 모델 각각이 가질 수 있는 경제 신학의 문제를 조명할 것이다.

 

2. 본론

2-1. 경제학의 이론과 모델의 목적에 대하여

① 경제이론의 정의

여기서 계속 언급되는 이론과 모델의 구분은 표준적인 정의가 있는 건 아니다. 대개 모델들로 이루어진 학문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모델'이 곧 이론이다.[각주:10] 물리학자가 "그것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그럴 듯한 설명력을 갖춘 논리구조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모델로 제시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이론과 모델을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해보자.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론은 설득력있는 가설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학에서는 보통 실험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자를 상대성이론으로 후자를 끈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자연과학에서 '이론'의 정의는 실험적으로 증명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실험으로 증명되지 못한 끈이론을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각주:11]

사회과학에서 이론은 그 성격이 많이 달라진다. 사회과학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그 복잡성이 크고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과학에서 이론이라 함은 실험된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가설들의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실험이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변명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경제학이 과학이 될 수 있는 두 가지의 기준이 보통 제시된다. 그것은 논리적 정합성과 현실설명력이다.

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경제이론이 보편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연구자가 미리 비-본질적인 것을 사상하고 본질적인 것만으로 구축된 가상의 세계 속에서 가능하다. 다만 실험될 수 없기 때문에 수학적인 정합성을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경제학은 현실설명력보다는 준칙에서 연역된 형식적 정합성을 완성하는데 매진하여 온 것이다.  또한 스라파 경제학의 생산가격이론에서 표준상품에 대한 증명, 그리고 마르크스경제학에서 투하노동량과 생산가격으로의 전형문제 등이 정합성을 충족하기 위해 이슈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합성이 갖춰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제한적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경제학에서 자연과학과 같이 통제된 실험은 경제학자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복잡하며 경제이론이 사상한(이른바 여타조건 불변 가정) 비-본질적인 것들이 경제현상에 변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론이 예측한 바와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조건에서 적용되는 모델로 경제현상을 설명할 필요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수학적 정합성을 즁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학풍도 있다. 이런 경우 역시 이론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있어 수학적 정합성은 닫힌체계로 정의해야하기 때문에 유연한 열린체계로 이해하므로서 사회의 다양성을 포괄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로드릭이 말하는 주류에서의 이론과 비주류에서의 이론의 성격이 나눠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를 닫힌 이론열린 이론으로 구분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한 마르크스경제학 내부의 긴장은 바로 열린 이론과 닫힌 이론의 긴장관계라고 다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때로는 열린 이론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어렵기까지 하지만 사회의 다양함을 설명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이는 결국 닫힌 이론의 영역에 독창성을 부여하고 혁신할 여지를 마련해주며 열린 이론의 특정한 주장을 튼튼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다양함을 포괄하는 것이 언제나 열린체계에서만 가능하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닫힌체계를 다루면서도 이 모델이 열린체계인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인다. 이때 현실도 모델과 같이 닫힌체계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교조주의라 볼 수 있다.

② 경제모델의 정의

보통 경제모델은 경제변수들 간의 함수적 관계로 표현된다. 그런데 모델은 특수한 조건에서 타당한 것이다. 예컨대 죄수의 딜레마는 두 죄수들이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하는 어떤 조건 하에서만 타당하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우화와 비유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와 맥락을 연결하는 모델이다. 둘째, 가상의 실험이 가능토록 하는 모델이다.

우화적 모델

예컨대 삼성과 LG가 자체개발한 OS의 스마트폰을 개발해서 내놓으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보수행렬은 다음과 같다.

  LG
자체OS Android
삼성 자체OS (5, 5) (2, 10)
Android (15, 1) (2, 1)

자체OS는 여러모로 IT기업의 기술력을 높여준다. 삼성이 만약 자체OS 모바일로 전략을 바꾸는 것을 검토한다고 하자. 향후 모바일 상품에서 Android 플랫폼을 포기한다면 당분간은 손해를 보게 되며 LG에게 Android 플랫폼 시장을 빼앗겨 버린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며 결국 둘은 Android 플랫폼을 선택함으로써 사회적으로는 최선의 이득을 주는 자체OS 플랫폼 개발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특정한 조건을 상정한 모델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이론이 아니라, 복잡한 관계를 단순화시키고 현실적인 맥락을 주어진 것으로 함으로써 경제현상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의 사례는 매우 단순하지만 왜 삼성과 LG가 자체 플랫폼을 사용한 모바일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이 로드릭이 말하는 "우화로서의 모델"에 대한 한 예시이다.[각주:12] 우화는 일종의 교휸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대체로 경제학은 현실을 설명할 때 맥락들을 연결지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그것이 현실과 다를지라도 복잡한 관계로 초래될 혼란보다는 단순한 직관을 얻는 쪽이 더 가치가 있다.

실험적 모델

경제현상이라는 대상은 실험을 하는데 있어 무척 까다롭다는 사실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경제학은 연구자의 머리 속에서 가상의 실험을 할 수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주 단순한 실험 혹은 사례를 통해 좀 더 복잡한 거시경제적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그레이트 캐피톨 힐 탁아조합의 사례[각주:13]가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크루그먼(1995)[각주:14]은 수식 없이도 이야기를 통해 쿠폰을 화폐로, 그리고 부족한 쿠폰을 부족한 화폐로 바꿔 일종의 거시경제의 경기변동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모델에서 연역된 변수 간의 인과관계를 통계를 통해 어느 정도로 상관관계가 강한지 추정해볼 수도 있다. (계량경제학의 영역이다)

③ 소결

경제학에서 이론이 보편타당하다고 하는 것은 사실 연구자가 머리 속에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한 상황에서 연역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물론 무엇이 본질이고 비-본질인가에 대한 논의는 방법론과 관련이 있기에 논쟁도 많은 부분이고 특히 고전파경제학 분야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스라파 경제학에서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논의를 다룬 고민창(2010)[각주:15]을 참고할만 하다) 따라서 그것 자체가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는 수리적 연구에 매진해왔던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 경제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특정한 조건에서 타당한 모델을 사용한다. 경제이론이 가정하는 본질만으로 이루어진 영역은 대체로 실험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예컨대 왈라스 일반균형이론이 말하는 세계는 가격을 조정하는 경매인, 그리고 경제주체들 간의 완전한 정보공유, 무한한 경쟁기업의 시장진입 등의 비현실적인 가정을 실제 현실경제를 설명하는 데 큰 쓸모를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생산가격이론을 갖는 마르크스경제학과 스라파경제학도 당연히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르크스경제학의 매우 유명한 문제인 '전형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큰 이득이 없다는 주장들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각주:16] [각주:17]

다시 말하지만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에서는 이론과 모델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론이 정합성을 추구한 이유는 실험이 어려운 이유에서 초래되었다. 그러나 이 통제된 가상의 이론은 현실을 설명할 때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특정한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류가 특정한 모델을 쓰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경제학은 특정한 모델보다 억지로 이론을 현실에 투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저하한다. 기술진보는 산업예비군을 증대시킨다. 이것과 반하는 현상이 있을 때 이를 설명하기 위한 특정한 모델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찌보면 마경이 교조주의가 더 심할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이들은 보편법칙에 너무 진착한 나머지 그 이론이 닫고 있는 요인들을 너무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그랬다) 다음 장부터 우리는 경제신학 혹은 교조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볼까한다.

 

2-2. 경제신학의 문제

폴리(2009)[각주:18]는 경제신학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나는 "아담 스미스의 오류"라는 말을 통해, 이처럼 이미 많이 논쟁이 되었던 주장보다는, 좀 더 미묘한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그 오류는 경제적 삶의 공간을 그 밖의 나머지 사회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리 잡고 있다.[각주:19]

경제학자들은 경제영역을 사회영역과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론 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로드릭 역시 마찬가지로 잘못된 부분임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ㅇㅈ? ㅇㅇㅈ ㅂㅂㅂㄱ

그렇지만 경제학자들은 모델을 잘못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자연과학을 경제학의 본보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모델을 모든 조건에서 적절하고 적용 가능한 유일한the[강조는 원문] 모델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더욱 유연하게 한 모델에서 다른 모델로 옮겨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각주:20]

로드릭이 말하는 유일한 모델로 받아들이는 경제학자의 태도야말로 일종의 교조주의이며 폴리가 지적하는 경제신학에 부합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경제신학이란 무엇인가? 폴리에 따르면 경제신학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바로 교조주의와 소박한 편의주의이다.[각주:21]

① 이론과 교조주의

여기서 말하는 교조주의란 이론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최저임금에 대한 일부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의 태도가 정확히 그렇다.[각주:22] 그런데 경제신학은 주류경제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도 혐의가 있다. <자본론>이 설파하는 이론을 교조적으로 해석한 경제주의는 여러 모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이를 문제삼은 대표적인 사상가들을 손꼽자면 그람시와 레닌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경제주의는 아예 사회적 삶의 공간을 경제 공간과 분리시키고 무시해버린다는 측면에서 교조적 경제신학이라 볼 수 있다.

마르크스경제학 연구자의 태도에서도 교조적 경제신학은 많은 부분 드러난다. 서론에서 든 예처럼 마르크스의 본래의 이윤율 정의를 유지하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여기서는 "그것이 현실을 더 잘 설명하는가?"에 대한 질문보다 마르크스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는 특정 인물의 무한한 신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교조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쁜 이유는 경제현상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방어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와 그 단체들에 대한 기독교단체들의 행태는 인권의 발전보다는 교리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정치권력을 얻으려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런 경제신학을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다면 위험한 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경제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고 어느 정도는 (일명 구좌파 외에는) 자정적인 기능이 있다고 판단된다.

② 모델과 소박한 편의주의

모델연구자가 특정한 모델을 다룬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근사적인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2-1의 소결에서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겠다. 로드릭은 이를 두고 경제학자가 겸손해야한다는 규범을 제시하며 이는 정확히 막스 베버가 말한 소박한 과학주의 혹은 소박한 편의주의라 할 수 있다.

과학의 이상은 논리와 증거가 함께 하여 사회의 본질에 관해 더욱 높은 수준의 확실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경제학의 주장은 일반성과 검증 가능성 모두가 제한적이다. 경제과학은 단지 엄격한 직관─논리에 의해 명백해지고 그럴듯한 증거에 의해 강화된 직관─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 전체는 일상의 사고를 단지 치밀하게 발전시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경제학의 모델은 고작해야 그러한 치밀한 발전의 일부를 제시할 뿐이다.[각주:23]

경제학자가 경제 영역만을 분리하여 근사적인 연구를 한다는 자각은 적어도 소박한 편의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그들은 그 이외의 열린체계에 대해 자신의 연구영역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보울스&긴티스(2011)[각주:24]는 이런 입장에서 경제학과 타 학문과의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경제를 포함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설명력이 어떻게 강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마르크스경제학 연구자의 위상은 독특하게도 열린 이론과 닫힌 이론이 서로 긴장관계를 맺고 있는 특수한 환경을 갖고 있다. 이런 긴장관계는 때로는 발전적이지 못한 경우도 자주 발생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유해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열린 이론이라고 모든 사회현상을 포괄하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계급을 즁심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이들이 그 기준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그것만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유효한 주체라고 편협한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알튀세르의 구조인과성과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을 통해 많은 부분 시정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③ 소결

마르크스주의는 열린 이론과 닫힌 이론이 상존하지만 둘 다 경제신학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준거점(계급)에서 초래한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모델을 마련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 있다. 이론적 가정이 현실 차원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특정한 모델을 선택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로드릭은 (주류)경제학자들이 특정한 모델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잘못 오용하는 경우도 지적한다.

경제학자들이 통상적으로 해당 모델이 어떤 조건에서 유용하게 되는지를 반드시 생각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 이러한 퍼지 요인fudge factor[인용자 주 : 괄호생략]은 모델이 잘못 사용될 가능성을 크게 만든다. 그 고유한 맥락이 제거된 모델은 적절하지 않은 환경에서 사용될 수 있다.[각주:25]

하지만 이것은 주류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결국 독특한 경제과학의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규범을 통해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주류 내부에서도 자정 기능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라인하르트-로고프 사건에 비추어볼 때, 비주류처럼 주류와 경쟁하는 경제학파의 존재가 가장 좋은 것이겠다(웃음))

모델을 다루는 연구자에게 소박한 편의주의는 실용적인 태도이며 닫힌 이론만이 존재하는 주류경제학에사는 적절한 타협점이라고 생각은 든다. 하지만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렇지 않다. 내부에서 열린 이론과 닫힌 이론이 긴장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다양한 모델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닫힌 이론은 보통 현실설명력의 기준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3. 결론

나는 로드릭의 제안처럼 마르크스경제학 역시 다양한 모델들을 받아둘이므로서 경제신학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델이 이론과 일관적인지를 신경쓰지 않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거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되돌아올 것이다. 그건 마르크스주의인가? 나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거다. 마르크스주의는 열린 이론이며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마르크스주의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것이겠다. 학자는 연구와 논문을 통해 가치있는 지식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더 없이 훌륭한 연구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관 글. 2018-02-21 작성]

  1. Rodrik, D. (2015). Economics rules: The rights and wrongs of the dismal science. WW Norton & Company. (국역본) "그래도 경제학이다 - 우울한 과학의 성공과 실패" p17. 생각의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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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Rodrik, D. (2015). op. cit. (국역본)p17. [본문으로]
  5. Morishima, M. (1973). Marx's economics: a dual theory of value and growth. CUP Archive. [본문으로]
  6. 김성구. 2015.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 실증분석에서 어떻게 곡해되었나? - 자본 물신성에 사로잡힌 이윤율 실증분석". 참세상 주례토론회 기고. [본문으로]
  7. 김덕민. 2015. "이윤율 논쟁과 “오래된” 마르크스적 이윤율의 역설 - 자본주의 위기논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4)". 참세상 주례토론회 기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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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Sweeney, J., & Sweeney, R. J. (1977). Monetary theory and the great Capitol Hill Baby Sitting Co-op crisis: comment. Journal of Money, Credit and Banking9(1), 86-89. [본문으로]
  14. Krugman, P. R. (1995). Peddling prosperity: economic sense and nonsense in the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s. WW Norton & Company. (국역본)"경제학의 향연". p48~49. 부키. 2009년 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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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류동민. (2016). 수리마르크스 경제학. p16.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본문으로]
  17. 그렇다고 정합성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일단 문제해결을 보류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두는 것이 좋지 않나싶다.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모델에서 어떤 제약이 있는 것인지 잘 알아야 한다. 주류 경제학이 자본논쟁의 부정적 결과를 무시했던 케이스를 끄집어내기도 하는데.. 그건 전형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본문으로]
  18. Foley, D. K. (2009). Adam's fallacy: a guide to economic theology. Harvard University Press.(국역본)"아담의 오류". 김덕민&김민수 역. 후마니타스.2011. [본문으로]
  19. Foley. D. K. (2009). ibid. (국역본)p10. [본문으로]
  20. Rodrik, D. (2015). op. cit. (국역본)p17. [본문으로]
  21. Foley. D. K. (2009). ibid. (국역본)p278. [본문으로]
  22. 한홍렬. “변방이 더 교조적” 떠올리게 한 한국 경제학자들. 한겨레 기고글.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32251.html#csidxa47cc097dc1d8b9b2adc06afa62a186 [본문으로]
  23. Rodrik, D. (2015). op. cit. (국역본)p9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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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Rodrik, D. (2015). op. cit. (국역본)p19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