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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살인자의 기억법 후기

현정경 2021. 5. 31. 05:56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리의 서재로 처음 보게 되었다

정액제로 운영되는 밀리의 서재를 첫 달 무료로 일단 사용하여보고 있다.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고 라노벨도 없어서 고민 중이다. 어쨌든 가장 먼저 읽게 된 건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소설의 소개

과거에 몇 십명을 연쇄살인하고 잠적한 살인자 김병수의 1인칭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고 그가 노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뒤 일기 형식으로 쓰여지는 형식이다. 알츠하이머 병이라는 특성상 그가 서술한 내용들은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가 여태까지 계속 기억하고 있는 기본적인 맥락은 유지되며 깜빡깜빡 하는 듯하게 스쳐지나간다. 그가 믿고 있는 기억들이 페이드되는 연출이 꽤나 흥미로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은희와 박주태의 정체

결말에서 드러나지만 그가 딸이라고 믿었던 은희는 사실 독거노인들을 보살피는 자원봉사자였을 뿐이고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믿는 박주태는 사실 그를 추적하던 형사였던 것.

알츠하이머와 치매?

의심스러운 점은 그의 알츠하이머 병 역시도 의심스러운 점이다. 수사 중에 그는 자신을 치매환자라고 진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은 엄연히 다른데도 말이다.

형사들은 수사 중에 김병수가 치매라고 말한 주장을 의심한다. 그러다가 이내 김병수는 '치매'라고 진술했다는 것조차 부정하기도 한다. "단지 피곤할 뿐"이라고 번복했다. 아무튼 이런 점으로 볼 때 알츠하이머 병이라고 검진받았다는 그의 초기의 기억 역시 조작된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조작'이라 함은 '편집'이란 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즉 김병수는 나름의 체계를 갖는 '망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조현병에 가깝다는 의심이 든다.

박주태와 정체감 장애?

여기서 김병수의 욕망은 기억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뒤로도 그는 계속 자신이 죽인 자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희생자인 은희에 대해 죽였던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매우 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이전에 서술된 그의 망상을 맥락적으로 연결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김병수는 박주태(사실 형사)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박주태가 딸 은희를 죽이려고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박주태를 죽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상 박주태는 그를 수사했던 형사였을 뿐이고 그의 망상 속의 박주태는 김병수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는 조현병과 함게 짬뽕된 이중인격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정신의학에서 이를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부르는 것 같다. 다른 인격 간에는 충돌이 있을 수도 있고 서로를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체성들이 적절히 통합되지 못한 정신적 장애의 하나이기 때문에 김병수 역시 이와 관련이 깊어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살인자라고 자각하고 있는 김병수에게 있어 또 다른 연쇄살인범 박주태라는 인물이 등장해야 했는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망상과 죄책감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약간의 힌트는 있다. 초기에 김병수는 연쇄살인범들이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라는 세간의 말들을 조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그는 은희의 부모를 죽이고 은희를 딸로 키우고 있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망상이 그에게 왜 필요했는가?라고 질문해보자. 실상은 은희의 아버지를 죽이면서 집안에 있던 어린 은희 역시 살해한 것이다. 자원봉사자로 온 사람이 그 은희와 같은 이름을 썼다는 것으로 "여태까지 딸로써 은희를 키워왔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유는 다름 아닌 죄책감에 연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

그는 이런 망상을 너무 믿어버린 탓에 자신의 범죄가 모두 밝혀질 것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은희가 박주태에 의해 죽었을 거라고 경찰에 자진신고를 넣었기도 했다는 점에서 김병수라는 인물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도망치고 싶어한 답이 없지만(?) 거기에서부터 얽힌 실타래를 또 얽혀버리는 바보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도 이 소설은 정말 잘 쓰여졌고 매우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재미도 있었다. 영화는 보지 못했으나 소설이 더 재밌을 거 같다.

[이관 글. 2020-03-0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