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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비서는 왜 있는 걸까

수행비서라는 게 대체 왜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직무 자체가 뭔가 보통의 직장인들이 말하는 "업무",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어서다. 라이프와 워크 간의 경계가 굉장히 흐릿하다는 점도 이런 의문에 한몫 했다. (이게 노동강도를 심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연예인 매니저도 수행비서와 유사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일은 전반적으로 삶의 공간과 업무의 영역이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군부대장이 당번병에게 집 허드랫일까지 시킨 일도 어찌보면 이 일의 본질이 노비가 해왔던 일이어서가 아닐까.

김지은입니다 표지
김지은 저. [김지은입니다]의 표지.

김지은님이 자신이 낸 책에서 안희정 수행한 작업들을 말하는 걸 보게 되었다. "진짜 뭐 이렇게 힘든 일이 다 있지?"라고 목구멍 밑까지 나왔다. 공장에서 반복 작업하고 거칠게 일하는 것과는 수준이 그냥 다르다.. 아침이 되면 전화로 잠을 께워줘야하고 스케쥴이 되면 알려줘야하고 지시사항 하부로 전달도 해야하고 구두도 잘 정돈해야하고 옷도 챙겨야 하고 청소도 해야하고 세탁기도 돌려줘야 하고..

생활까지 대신 수행하는 수행비서체계의 문제

기본적으로 인간이 게으르기 때문에 그렇긴 하겠지만.. 왜 연예인들이 연예인 생활을 그만두면 이런저런 생활 관련해서 무지랭이가 되어버리는지 잘 알 것 같다. 매니저와 수행원들이 대신 해왔으니까 그런 거다. 아예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이 사람을 본업에만 몰빵 집중하게 해서 완전한 전문인을 만드는 수행지원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로써 독립성이 떨어지는 그릇된 인간을 만들 것도 같다. 성격을 말하는게 아니다. 이런 능력은 현대인에게 일반적인 교양이다. 즉 스스로 스케쥴을 잡고 옷을 고르고 화장하고 아침에 깰 줄 아는 자본주의 노동자 서민의 당연한 일과이다. 그런 습관이 텅 하고 비어있는 인간을 만들어버리는 거다.

경계의 모호함에서 오는 갑질. 업무표준화가 필요하다

난 이런 직종들에 대해 업무경계의 표준화라든가 부당업무지시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나왔으면 한다. 커리어도 수행대상의 특성을 너무 타서 해고되면 다른 일을 해야할 거 같다. 김지은님의 전임자도 8년을 수행비서를 했던 사람인데 뭔일이 있었는지 8일 전에 안희정에게서 해고를 당했다고 한다. 정치인 수행비서는.. 진짜 해고면 끝장이겠다싶더라.

박원순과 비서관 모습
KBS 2TV 설 특집 파일럿프로그램'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온 서울시장 비서관과운전주무관

해서 이런저런 방어권이 수행비서들은 너무 약하고 무력해보인다. 이런 가이드라인은 당에서도 지방정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일텐데, 앞으로 남성 수행원만 쓰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이런 불합리함에 눈을 돌리게 되는 거다.

예전에 방송에서 박원순 시장과 수행비서들의 (내가 봐도 마음이) 불편해보이는 상하관계를 보며 일반적인 직장에서의 상사-부하 관계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분위기를 김지은 님의 책을 보고나서야 알았는데.. 중간관리자-부하가 아니라 회장과 (직급낮은) 사원 관계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다.

전직 수행비서 인터뷰

이 직종이 없어지긴 힘들더라도.. 뭔가 명확한 업무 경계가 필요해보인다. 김지은 님 책을 보면 선배가 "수행비서에는 업무 범위가 없다"는 말에서 드러난다. 나는 묻고 싶다. 이러한 변명이 왜 지금까지도 통해왔을까 하는. 아동노동이 만연했던 시절에는 아동들의 노동은 사실상 업무범위란게 없이 무슨 일이든 다했다. 숙련도가 낮았던 아동들을 그래도 고용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잡다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고 여기에서 분명 어른 노동자들도 이득을 보았을 것이고 가부장시스템에서는 약간의 소득을 가족에게 안겨 주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 야만적인 아동노동이 유지되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업무 범위가 없다고 하지 말고 이러저러한 불합리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지금이라도 경계를 명확히 하도록 현장에서도 당에서도 연예계에서도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피해자와 연대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

결론

특히 이번 박 시장 건에서도 드러났듯이 정신적 위안을 주고 기분을 맞춰드리는 뭐 이딴게 정상적 업무범위에 들어가서는 안될 것 같다. 이런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업무'는 존재해서는 안된다. 이런 "기분에 맞춘다"는 업무를 정상 업무가 아니라는 인식이 갖춰져야 한다. 박 시장 전에 김지은 님이 이걸 지적해왔다는 건데... 이게 아직도 제대로 자정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관 글. 2020/12/31, 10:25 오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