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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자발적 야근의 본질

현정경 2021. 8. 1. 01:09

사뮤엘 보울스(2016)[각주:1]는 재밌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1950년대 초 자신이 대통령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흥분되고 활기차던 분위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전했다. "사람들은 격무에 시달렸지만, (...)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만으로도 보상받았죠. (...) 대통령이 토요일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뒤로는 토요일 회의가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습니다."[각주:2]

 

이 사례가 재밌는 이유는 야근의 이중적인 성격에 대해서이다. 야근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지불자에게 비용을 초래하지만 만약 지불주체인 고용자가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하면, 즉시 자신이 보상이 없는데도 밤낮없이 일해오던 야근의 본질인 "호혜성"이 사라지게 되고 합리적 계산을 하며 기회비용에 신경쓰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저런 경험이 있다. 내가 야근하는 것은 일이 재밌어서였지 그것으로 내가 포기한 야근수당을 계산에 넣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해온 나에게 고용주가 야근수당을 지급하겠다고 선포한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평소 야근해온 시간대로 할 때 하루 1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상황에서 합리적 경제인이 되어 그런 돈을 벌 바에는 차라리 여자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국밥(?)을 먹는 것이 더 나은 효용을 얻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시간은 10만원보다 내게 더 가치있는 일이라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OECD 근로시간 정보
출처: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51031046951009

그렇다면 야근수당을 받지 못하는 한국에서 보통의 직장인들이 데이트를 포기하고 야근을 택하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높은 노동시간으로 말들이 많은데 사실 이 높은 노동시간들은 노동자들이 포기한 경제적 소득이라고 보기보다는 조직체계와 명령관계에서 초래되었을 뿐이고 그 본질은 "내가 회사에 호혜를 베푼다"는 것이다. 보통 야근수당을 받지 못하는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야 외연적으로는 "이따위 직장 때려치지"라든가 "이 월급받고 내가 왜 저녁 없는 삶을 살지 엉엉" 라고 하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잘 버티며 잘 다니는 이유는 분명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즉, 보통의 직장인들은 기회비용을 계산에 넣고 직장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나는 꽤 오래전에 이런 점을 많은 부분 느끼고 있다. 나 역시 돈 때문에 여기서 일하나 싶다가도.. 좋은 동료들도 있고 그들과 일하는게 기쁘고 일을 배울 수 있어서 다니는 것도 중대한 요인인 것은 같다. 한국의 직장인들이 그래서 야근수당 안줘도 어찌저찌 일하고 사는 이유는 사실 그가 회사에 야근으로 베풀고 있다는 것이 본질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조직들은 "조직주의"라기보다는 "동료와 조직 간의 호혜성"에 기반한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문제는 이런 야근들이 사실 자발적 야근이고 그 자발성은 결국 조직과 회사에 호혜를 베푸는 것이 본질인데도, "선배들이 그랬으니 신입사원인 너희들도 본을 받아라"라는 식으로 야근을 강요하면 어쩌겠는가? 본말이 전도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직활동 당시 만난 면접관 이야기
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야근을 "베푸는 것"인데 이런 말 들으면 하고싶겠나? 출처 : https://www.inven.co.kr/board/webzine/2097/1691576

신입사원들이 "요즘 애들"이라서가 아니다. 그들이 조직에 호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거나 그만큼 적응이 안되어서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호혜를 베푸는데는 그만큼 조직과 동료에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므로 그런 가치있는 조직을 만드는 게 먼저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야근을 하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지 않겠나.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의 발전의 관점에서 언제든 어떤 사회에서든 지배적이지 않은 대안적인 사회형태가 태내에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보울스가 이런 호혜성이 일정부분 존재하고 유인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건 무척 흥미로웠던 이야기다.

  1. Bowles, S. (2016). The moral economy: why good incentives are no substitute for good citizens. Экономическая социология, 17(4), 100-128. (국역본)새뮤얼 보울스 저. 「도덕경제학 - 왜 경제적 인센티브는 선한 시민을 대체할 수 없는가」. 최정규, 박용진, 전용범 역. 흐름출판 [본문으로]
  2. ibid. p82. 3장.도덕감정과 물질적 이해관계 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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