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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립군」을 보게 되어 포스팅을 남긴다.

일단 이 영화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는 다른 영화와의 차이점은, 매우 독특하며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일반 양민을 주인공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정과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임진왜란 영화와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 나오는 대립군으로 나오는 주인공들은 노비계급은 아니다. 노비는 군역에서 면제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남의 군역을 대신 대립해주는 이들은 대체로 가난한 일반 양민으로 나온다.

대립군이란 무엇인가

먼저 대립군이란 것에 대해 알아보자. 대립군을 알려면 우선 조선시대의 군역의 의무에 대한 제도를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군역의 의무는 노비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는 걸 기본으로 하지만 조선 건국 후 평화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군역을 하는 병사들이 대체로 토지 및 건설에 노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역이 상당히 가혹하고 힘들었던지 돈이 있는 양반가 쪽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 대신 입역시키는 대립군이 파다했다고 한다.

군역틀 피할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방군수포'라 하여 일단 한양으로 군역하러 올라온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방군) 대신 조정은 이들에게 면포나 쌀을 받아내는 것으로 군역을 면제해주는 것이라 한다. 이런 행태들은 당시 제도로 보면 다 불법이었다. 그런데 조정은 이를 묵과했다. 아무래도 조정으로서는 군역을 들이지 못하는 대신에 재정을 확충할 수 있게 되었을테고 이런 점에서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벌어들인 재정을 군사력을 증강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면 모르겠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력이 허약했던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되기도 한다.

군역 회피라는 암묵적 제도를 통해 보이는 조선의 화폐경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불법적인 군역회피 행태들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이는 결국 면포, 쌀 등을 화폐처럼 이용할 수 있었던 배경 때문에 군역회피가 가능했다는 점이겠다. [각주:1]

마르크스경제학 식으로 말하자면 면포, 쌀 등이 화폐상품으로 사용되는 형태를 일반적 등가물이라고 표현한다. 예컨대 면포의 교환가치가 모든 상품과 거래할만한 등가물로 사회적으로 용인되면 화폐와 같은 위상을 갖는다는거다. 그러나 이는 현물이다. 상품교환시장이 매우 발달하여 일반적 등가물이 가치형태가 되는 데까지는 나아가진 않은것이다. 조선은 법정화폐를 여럿 시도하다 실패해왔는데, 조선 후기에 상품교환의 필요조건인 잉여생산물이 증대할만큼 농작법이 발달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의 유통이 활발할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의주로 피란한 선조, 광해에게 전란의 관리, 국정을 모두 떠넘기다

어쨌든 이 영화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북상하고 있던 시점에 선조가 북쪽 평양을 거쳐 영변에 도착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1592년 4월 29일. 임진왜란이 시작된지 16일 째 되던 날 선조는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고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명한다. 그리고 광해에게 강계로 가서 의병을 모으라고 한 후 선조는 반도 최북단인 평양북도 의주로 다시 도망간다. 비열한 새끼.

이 영화는 광해가 영변에서 강계로 가는 동안 대립군이 호위를 하게 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구글 지도로 보니 북한의 국도 제 65호선을 경유하여 212km에 차로 2시간 40분이 걸리는 거리이다.[각주:2]">https://goo.gl/maps/EAnRyDC6Sw32[/footnote] 영화에서는 광해를 호위하는 병력이 너무 초라하게 나오는데.. 설마.. 당시 한양을 이미 접수해서 일본군들이 선조를 찾으려고 북진하고 있었을텐데, 저런 조약한 병력으로 호위를 했을라고..

그런데 광해가 의병을 모으는 1년동안의 과정을 기록한 정탁의 「피란행록(避亂行錄)」에서는 영화처럼 왕이 막 노숙을 하고 굉장히 고생했다는 점들은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영화처럼 왜군과 민란에 의해 암살하려는 시도들이라거나 치열한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영변에서 강계로 가는 과정에서 혹독한 행군을 해야 했던 산악로를 선택한 이유는 북상하고 있던 왜군 때문이었을거다. 6월 1일에 접어들어 평양을 쟁탈하려는 평양성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상당히 빠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광해의 피란 초기에는 왜군을 피해 산악로를 중심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강계산성 전투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영화적 상상력이다. 생각해보니 강계는 북쪽 끝에 있기도 하고 이 지점이면 북쪽에서 여진족들이 자주 침략할만한 곳일텐데, 그에 대비하기 위한 산성이 어째서 절벽을 등지는 형태일 수 있겠는가.

양민들의 갈등

하지만 영화는 광해의 활약이 주가 아니라 호위병력인 대립군들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왕이 나라를 버렸고 양민인 이들이 자기들 살 길을 궁리하면서 내부의 갈등이 붉어지곤 한다. 재밌는건 그들의 기회주의적 행동이나 배신은 자기이득 때문이 아니라 "우리끼리라도 살아남자. 저 지배층들 무시하자. 나라 버리고 허수아비다.우리라도 살아야지."와 같은 공동체적 감수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실제로도 당시 민심은 그랬을 거다. 왕이 한양 수도를 버리고 평양으로 피란갔다는 사실을 안 한양의 민초들이 이에 분노하여 경북궁을 불태웠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물론 경북궁을 불태운 건 노비 계정을 없애려 했다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조정은 판단했었기도 하다.[각주:3]

어쨌든 호위를 맡고 있던 대립군들의 이러한 갈등을 낳는 논리에 대해 대립군 대장인 "토우"는 완강히 반대한다. "도망가더라도 우리 처지는 나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광해 저 분이 성군이 될 수 있는 이라면? 이 전투는 걸어볼만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토우가 고난의 피란길에서 여러 지점에서 광해를 신뢰할 수 있는 왕으로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전란기라는 상황으로 보건데 광해는 잘하긴 했다. 다만 전란 후에는 비판받을 짓을 많이 해서 폭군으로도 평가되곤 했다. 허나 이건 결과론이다. 결정해야했던 것은 그때 뿐이었으니까.

근왕주의(勤王主義)로 흐른 납득하기 어려운 서사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근왕주의적 서사라고 할까. 백성은 선군을 섬기고 충성을 다하고 선군은 민심을 바르게 읽어 잘 통치해야한다는 당위가 너무 엿보여서 불편했다.

이 영화가 다른 영화에 비해 일반 양민을 주인공으로 했고 당시 민심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는 점 역시 박수를 보낼 시도이긴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당시 왕정제 하에서 양민으로서 기대할 수 있던 건 성군을 기대할 수 있는 것 뿐이었으리라는 안타까움이랄까. 지금 민주제 하에서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의 말처럼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는 말이면 충분할 것이다.

보통 사극들이 이러한 근왕주의로 흐르는 면이 없지 않았고 민초들의 주체성이 탈각되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 모르겠으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은 결국 현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온당한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근왕주의는 이 시대의 사람에게 불필요한 매세지이다. 관료들에게는 메세지를 줄지 모르나 대개의 관료가 아닌 일반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어떠한 보편성도 없을 것이다.

  1. 한명기, 윤용출 교수에 따르면 군역회피의 두 가지 대표적인 방법인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는 16세기부터 성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https://www.google.co.kr/…/article.amp.html%3Fsname=news&co…  [본문으로]
  2. 구글 지도 경로 [본문으로]
  3.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본문으로]